양창욱 : 11일 '양창욱의 아침저널' 3부입니다. 목요일 3부는요, 목요스페설 '그 사람, 지금' 순서가 준비돼 있습니다.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보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6, 70년대 최고의 농구스타 신동파 선생님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동파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신동파 : 네, 안녕하십니까.
 
양창욱 : 네. 이렇게 아침 일찍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동파 : 네.
 
양창욱 : 74년에 선수생활 은퇴하셨으니까 벌써 40년이 됐네요?
 
신동파 : 만 40년이 됐습니다.
 
양창욱 :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신동파 : 뭐 최근에는 제가 대한농구협회 임원을 한 30년여 년 정도 했고요. 대한체육회 이사도 했는데 이제 재작년부터 전부 그런 공식적인 자리는 제가 그만뒀고, 초등학교농구연맹, 어린아이들 꿈나무 연맹이 있는데 거기 지금 부회장직을 하나 맡고 있어요. 그리고 그동안에 선수 생활, 그리고 감독생활, 또 TV, 라디오 해설을 한 15년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것도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지금은 쉬고 있는 편이죠.
 
양창욱 : 네. 우리 아버지 시대의 마이클 조던, 영원한 농구 영웅, 이렇게 선생님을 수식하는 수식어들이 많습니다. 요즘도 가끔 농구를 하십니까?
 
신동파 : 지금은 못해요. 이제 나이도 있고, 제가 오랫동안 어깨를 많이 써가지고 농구가 이제 뭐 전신운동이니까 무릎, 허리, 어깨 이런 데가 요즘 쉽게 이야기하면 골병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요? 다치지도 않았는데 어깨가 몇 년 동안 아파가지고 이제 치료하러 다니기도 하고, 운동도 하고 그러는데 농구는 지금 못합니다.
 
양창욱 : 네. 농구공 잘 안 만지시는군요?
 
신동파 : 네.
 
양창욱 : 어릴 때는 원래 야구선수가 꿈이셨다고요?
 
신동파 : 그렇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어야 되겠다는 게 꿈이었는데 그 당시에 1950년대 중반, 60년대 그 때 우리나라 최고의 홈런타자가 있었어요. 박현식 씨라고요. 그래서 그런 선수가 되겠다는 게 꿈이었는데,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야구부에 들었다가 한 2개월 만에 쫓겨났어요.
 
양창욱 : 아니, 왜요?

신동파 : 아니, 너무 몸이 약하니까... 키는 크지만 야구 선수가 되려면 몸이 튼튼해야 하는데 저보고 감독 선생님이 부르더니 공부를 하라고... 그래서 그게 결국은 야구부에서 나오게 된 동기인데 굉장히 어린 마음에 나의 희망이 꺾여 지는 그 순간, 좌절이라고 할까요? 아주 앞이 캄캄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운동장을 외면하고 등하교를 하다가 어느 날 전체 학교 조회를 아침 시간에 서는데 어느 선생님이 저보고 방과 후에 교무실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특별활동 하는 거 있냐고 묻기에 없다고 하니까 내일부터 체육복 가지고 나와서 농구하라고, 농구장으로 나오라고 해서 사실 그 때는 제가 농구는 링에다가 그 공을 쏘아서 집어넣는 경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몇 명이 하는지도 몰랐어요.
 
양창욱 : 아, 아무래도 선생님은 키가 크셔가지고 눈에 띄셨나보죠?
 
신동파 : 네. 그래서 그게 인연이 되가지고 지금 농구 시작한지 57년 됐습니다.
 
양창욱 : 네. 참 오래됐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신동파 : 네. 그동안 제가 중학교 2학년, 3학년이 되면서 농구에 미치기 시작했어요. 농구의 묘미라고 할까요? 농구에 매력을 느끼고 오히려 부모님이 반대하는 것도 제가 속여가면서 농구를 하다가 어느 정도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제가 이름이 신문이나 매스컴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저희 부모님이 거기에 호응해주시고, 이왕 운동을 시작했으니 학업도, 공부도 하면서 운동을 해라, 하면서 좀 밀어주시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고등학교 3학년 때 국가대표가 되는 영광을 제가 안게 됐어요.
 
양창욱 : 네. 고등학교 3학년 때 국가대표가 되셨는데 자연스럽게 국가대표 활동 시절로 넘어갑니다. 은퇴하실 때까지 단 한 번도 국가대표 팀 명단에서 빠지신 적이 없죠?
 
신동파 : 그럼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고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시간이 걸려도 말씀드린다면 세계올림픽 2번, 동경올림필, 멕시코올림픽, 이게 1964년, 1968년, 그리고 2회서부터 2, 3, 4, 5, 6, 7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이것을 줄여서 ABC대회라고 하거든요? 그거 이제 12년간 제가 국가대표를 했고요. 또 세계선수권 대회 1번, 그리고 세계유니버시아드대회 2번, 그리고 아시안게임 2번, 이렇게 해서 제가 뭐 대표선수 생활하면서는 한 번도 거기 명단에서 빠진 적이 없어요.
 
양창욱 : 그렇군요. 그런데 한 가지 제가 지금 언뜻 들어서 여쭤보고 싶은데 원래 지금 우리나라 농구선수들은 다 원 핸드 슛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원 핸드 슛을 선생님이 처음으로 하신 거라면서요?

신동파 : 그건 아니고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투 핸드를 사용했어요.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성인 선수들 있죠? 농구에서도 투 핸드 점프 슛을 쏘는 선수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원 핸드라는 것은 거의 생각을 못할 정도로 투 핸드를 많이 우리 선배들이 사용하셨는데 제가 중학교 3학년 끝나고 겨울 방학에 코치 선생님이 저를 부르더니 앞으로 동파 너는 훌륭한 선수가 되려면 투 핸드 가지고는 안 된다, 그러니까 원 핸드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해서 원 핸드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아주 처음에는 답답해가지고, 슛을 쏘면 볼이 링에 가지도 않아요. 한 손으로 쏘니까, 이게 습관이 안됐으니까요. 그래가지고 제가 그걸 익히는데 한 6개월에서 1년 걸렸어요. 그래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아령, 뭐 이런 거를 해서 팔운동도 하고, 다리운동도 하고, 그 다음에 학교 운동장이나 계단 이런 곳에서 런닝도 많이 하고요. 그래가지고 힘을 기르기 시작했죠. 일단 체력을 배양해야하니까요. 그렇게 하면서 팔에 힘이 생기면서 이제 한 손으로 제가 중심을 잡기 시작해서 고등학교 2학년 되니까 제 폼이 형성이 됐어요. 그래서 그 때는 뭐라고 할까, 투 핸드를 사용할 때보다 훨씬 더 간단한 그런 슛 폼이지만 정확도가 투 핸드보다 더 높았고, 거기다 제가 훈련을 좀 신경 써서 많이 하다보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 이제 국가대표가 되고, 뭐 제가 쏘는 슛은 거의 다 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대표가 된 겁니다.

양창욱 : 네, 그러시군요. 선생님 나오셨다고 하니까 문자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7999님, '신동파 선생님, 반갑습니다. 어릴 때 농구 뛰시는 것만 TV로 봐왔는데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니 새롭네요.' 이렇게 문자를 주셨습니다. 2537님, '저희 아버님이 참 좋아하셨어요. 지금도 신동파 선생님 활약에 대해 이야기해주시네요.' 이렇게 지금 문자들을 주셨습니다. 선생님하면 지금 빼놓을 수 없는 국가가 필리핀입니다. 필리핀에서는 선생님 존함이 행운, 복, 만사형통 이런 뜻으로 사용된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영웅이 되셨습니까?

신동파 : 네. 그게 1960년대 중반까지는 아시아에서 필리핀을 이기는 팀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농구의 아주 최강국이고, 거기의 국기고, 전국민이 남녀노소가 농구를 사랑하는 나라거든요? 그런데 제가 1969년도에 제 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를 방콕에서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필리핀하고 최종 결승을 하게 됐는데 거기서 이제 지면 우리는 준우승이 끝이고 이기면 그 때까지 농구가 미국에서 한국에 들어온 지 60년 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60년 동안 한국은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어요. 아시아에서 3위 내지 4위를 했는데 필리핀, 중국, 대만, 일본 그 다음에 한국이었는데 그 해에 1969년 12월에 그 대회에서 우리가 필리핀하고 최종 결승을 했는데 우리나라는 그 때는 사실 못 살았잖아요? 그래서 라디오로 생방송 중계를 했고, 필리핀은 우리보다 잘 살았기 때문에 거기 체육관 옆에 중계차를 갖다 놓고 TV로 실황중계, 라이브로 7천 3백 개의 섬이거든요? 필리핀이? 거기에 TV 중계방송을 실황으로 했어요. 그러니까 그 때 그 날 저희가 역사상 처음으로 필리핀을 95 대 86으로 9점을 이기고 우리가 우승했습니다.

양창욱 : 네. 그 때 선생님 몇 점이나 득점하셨어요?
 
신동파 : 제가 그 날 50점 넣었습니다. 그러니까 50점을 넣으려면 슛을 쏜 것은 거의 다 들어가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뭐 안 들어간 것은 거의 TV나 이런 것을 보면 믿기지 못할 정도니까 필리핀 사람들은 저보고 백발백중이라고 하죠? 뭐라고 할까, 하나의 신이다, 저거는, 있을 수 없는 것을 했다고 해서 그러고 1970년 5월부터 매년 5월에 제가 몸담고 있는 기업은행 저희 남자 팀이 필리핀에 초청받아서 친선 경기차 매년 한 5년 동안 거기 갔습니다.
 
양창욱 : 요즘도 필리핀에 자주 가세요?
 
신동파 : 요새는 뭐 교민회에서 행사가 있다고 하면 저를 초청해주거든요? 그러면 제가 여기서 만사 다 제쳐놓고 거기 참석해요. 그래서 제가 최근에, 9월 달에 갔다 왔는데 그 때 여기 LG 프로 농구단이 거기 전지훈련 차 방문을 했었는데요. 그 때 제가 거기 초청받아서 거기 행사에 참석하느라 갔었어요. 그런데 저를 알아보는 그 나라 사람들의 농구 열기를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는 뭐 2, 30대는 저를 지금 모르잖아요? 거기 2, 30대는 저를 다 알아요. 제가 은퇴한 지 지금 40년이 넘었는데 사인해달라고 해서 사인을 해주면서 아니, 어떻게 나를 아느냐, 너 몇 살이냐, 하면 21살이래요. 내가 은퇴한 지 40년이 됐는데 어떻게 날 아느냐고 하니까 오히려 신기해서 질문하면 이 젊은 사람들이 아휴,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이야기도 듣고, 책에서 봤대요.
 
양창욱 : 그렇군요. 1969년도 필리핀과의 농구 경기에서 영웅이 되신 이후 40년 넘게 필리핀에서는 영웅으로 불리시는데 필리핀에서는 실제로 슛을 성공시킬 때마다 신동파! 라고 외친다고 해요.
 
신동파 : 농구뿐만 아니라 골프 그린에서 퍼팅을 해서 이게 한 번에 들어가면 제 이름을 부릅니다.
 
양창욱 : 아... '신동파' 라고 하는군요. 들어가기만 하면 '신동파'라고 하는 군요.
 
신동파 : 네. 성공, 행운 이런 의미를 갖고 있으니까요.
 
양창욱 : 네. 선생님, 문자 소개 좀 몇 개 더 드려보겠습니다. 2190님, '신동파 선생님 트랜지스터라디오로 중계를 듣던 추억이 아련하게 생각납니다.' 5261님, '농구의 전설 신 선생님 반갑습니다. 선생님 보면서 운동이 저렇게 재밌는 거구나, 하고 느꼈던 그 때가 기억납니다. 대단하셨습니다. 건강하세요.' 이렇게 문자주셨고요. 0755님, '저희 친척이 필리핀에 삽니다. 인기가 대단하시다고 익히 들었습니다. 건강하세요, 선생님.' 이렇게 문자들을 주고 계십니다. 혹시 필리핀에서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은 안 드셨습니까?
 
신동파 : 그 때는요, 제가 한 5년 동안 70년부터 은퇴할 때까지요, 매년 거기 가면 필리핀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어요. 거기 와서 농구하라고, 우리가 조건은 이렇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그 당시 생각할 수 없었던 좋은 조건들을 제시했는데 그 당시에는 제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갈만한 그런 국가적인 상황이 못됐어요. 만약에 제가 간다고 했으면 뭐 돈에 팔려가는 매국노니 뭐니 하면서 국민정서가 그걸 용납을 안 할 시대였거든요. 그래서 못 갔는데 지금은 이제 나이도 이렇게 먹고 있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거기 가서 기자들과 인터뷰 하다보면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겠냐는 질문을 해요. 그래서 내가 아, 물론이라고, 농구를 한다고, 그런데 한 가지 더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 생각이 되는 것은 꼭 그 때는 필리핀에 와서 농구를 하고 싶다, 라고 하면 기자들이 박수 막 쳐줍니다.
 
양창욱 : 그렇겠네요. 잊을 수 없는 은사님이나 선생님들, 지도자, 이런 분들도 있으실 것 같아요.
 
신동파 : 네. 제가 그 야구부에서 1957년도에서 쫓겨나서 조금 좌절한 상태에 있을 때 한 두 달 만에 학교 조회에서 제 어깨를 두드리면서 저를 방과 후에 오라고 했던 선생님이 농구 부장이었어요. 어수덕 선생님인데 지금은 미국 시애틀에 이민 가 계셔서 거기서 지금 계시기 때문에 제가 요즘 못 만났는데요.
 
양창욱 : 아, 아직 생존해 계시는군요?
 
신동파 : 네. 그런데 제가 이제 미국에 가면 LA 같은 데서 전화를 드려요. 그러면 정말 반가워해주세요. 그 선생님이 기억나고요. 잊을 수가 없죠. 저한테는 은인이시니까요. 그리고 제가 중학교 때 농구 시작할 때 저한테 농구 레이업이라든가, 드리블이라든가, 이런 것을 가르쳐 준 고등학교 3학년 선배가 있어요. 최영식 선배라고요. 그 분이 저에게 농구 기본기를 많이 가르쳐 주신 선배였어요.
 
양창욱 : 그럼 반대로 지도자 생활을 오래하셨는데 특별하게 아끼고 기억나는 제자가 있으십니까? 많으시죠?
 
신동파 : 네. 제가 이제 은퇴하자마자 기업은행에 몸담고 기업은행 감독으로 2년 하다가 여자팀으로 제가 전향합니다. 그래서 1976년부터 거기 태평양 화학 여자 농구단 창단해서 거기서 감독 생활을 쭉 했는데 뭐 여러 제자들 다 좋은 선수들, 국가대표 선수도 많이 나왔는데 거기 홍혜란 선수도 있고, 홍영순 선수도 있는데 우리나라 여자 농구의 대명사죠. 박찬숙. 박찬숙이 저의 제자라고 할까요? 국가대표에서도 같이 외국에 나가서 생활을 했고, 국내에서는 뭐 우리 팀, 태평양 화학에서 같이 했던 박찬숙 선수가 기억에 남습니다.
 
양창욱 : 박찬숙 선수 모르시는 분들이 잘 없죠. 요즘 농구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합니다. 프로 농구도 활성화되어 있긴 하지만 과거 영광에 비하면 좀 미진하다, 이런 얘기들이 있는데 어떻게 보세요?

신동파 : 지금 말씀하신대로 잘 보셨어요. 왜냐하면 농구가 이제 야구라든가 뭐 축구에 좀 밀리는 거는 확실하거든요? 그런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당시 5, 60년대, 70년대 그 상황하고 너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요. 체육의 다변화가 일단 지금 이루어졌기 때문에 종목이 많아지지 않았습니까? 뭐 올림픽하면 양궁이나 이런 게 많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게 없었어요. 그래서 농구 말고 그렇게 종목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들이 농구를 더 사랑해주시지 않았나, 이런 생각도 들고, 또 한 가지는 우리 때는 돈보다 명예, 이런 것을 중요시하던 시대이기 때문에 가슴에 태극기를 달면 더 이상 부러운 게 없고 최종 목표가 태극기였거든요? 그러면 국가를 위해서 내가 뭘 해야 하나, 그런 사명감이나 애국심, 자부심 이런 것들을 가지고 제가 선수생활을 해왔는데 가만히 보면 요즘 선수들은 프로가 생기고 그러다보니까 시대의 변화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겠지만 선수들이 너무 금전적인 데에 치우치다보니까 국가에 대한 개념이 우리 때보다는 조금 약해요.
 
양창욱 : 국가보다는 돈에 많이 치우치게 되는 거군요.
 
신동파 : 네. 그러니까 대표 선수 선발하면 거기 당연히 들어와야 하는데 안 들어오는 선수도 있어요. 왜 그러느냐, 이제 몸 상태가 안 좋고, 프로에서 한 6개월 뛰다보니까 지치기도 했고, 무릎도 안 좋고, 그렇게 하다보니까 치료해야 되겠다면서 진단서 대한농구협회에 내놓고는 빠지려고 이러는 선수들이 많거든요? 그것이 우리가, 제가 생각할 때 참 이해하기 힘든 요즘과 옛날의 차이점이라고 할까요? 그러다보니까 농구가 좀 국제 경쟁력에서도 떨어지고, 정상권에서도 멀어지고, 팬들이 외면하게 되는 거죠, 아무래도.
 
양창욱 : 네. 참 귀담아 들어야 할 소리 같습니다. 선생님, 오늘 말씀 정말 감사드립니다.
 
신동파 : 네, 감사합니다.
 
양창욱 : 네, 지금까지 목요스페셜 '그 사람, 지금' 신동파 선생님과 함께 했습니다.

 
 

양창욱 / wook14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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