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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에서] ‘열하일기’ 중국 승덕을 가다.
홍진호 기자 | 승인 2014.11.02 14:45
   
▲ 중국 승덕 피서산장 열하 발원지
최근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의 무대, 중국 승덕을 다녀왔다.
 
삼국지를 세 번 정도 읽은 게 전부로, 중국 역사에 무지했지만, 장구한 세월을 관통하는 열하일기의 의미는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고, 가슴을 뛰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중국 역사는 헤겔의 변증법적인 법칙으로 발전해 온 것 같다. 중국문명을 일으킨 중원의 ‘한족’이 正이라면, 몽고, 만주, 티베트 등 수많은 변방의 소수민족은 反이다. 마치 여당과 야당처럼, 어느 한쪽이 부패해 쇠락하면 어김없이 변방이 중원을 점령해 合, 즉 ‘통일’을 이뤘다.
 
그러나 소수 변방의 민족들은 중원의 다수민족인 한족을 오랜 시간 통치할 수 없었다. 몽골의 징기스칸을 보자, 전 세계를 벌벌 떨게 했던 원나라의 중원 통치는 고작 100년 정도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명나라를 거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원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상징적인 곳이 바로 중국 승덕의 피서산장 일대이다. 흔히들 피서산장하면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정도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티베트, 몽고, 위그르 등 언제 중원을 위협할지 모르는 소수민족을 통치하기 위한 제2의 수도라고 할 수 있다.
 
신문물을 주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북학파의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 사신의 일행으로 피서산장에 다녀온 후 그 기록을 생생히 남겨 당시 조선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열하’는 피서산장에 있는 온천의 발원지로 강물이 얼지 않아 ‘열하’라고 불렸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힘을 얻어가는 당시의 혼란스러운 국제정세는 영화 <광해>에도 자세히 나온다. 광해군은 한족이 세운 성리학 국가인 명나라 대신 날로 힘이 커져 가고 있던 청나라와의 실리 외교를 펼치려 하다, 당시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 뜻이 좌절된 것으로 나온다. 조선에 있어 명나라는 나라의 근간인 성리학의 원류이자,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운 은혜의 나라이고, 청나라는 그런 명나라를 멸망시킨 오랑캐의 나라인 것이다. 하지만 눈 밝은 선비들에게 연암의 견문록 ‘열하일기’는 새로운 시대에 조선이 나아갈 길을 반추해 보게 하는 나침반이었다.
 
다시 열하일기의 무대인 피서산장을 이야기 하면, 황제의 여름별장인 이곳은 강남 등 중국 각지의 명승지를 축소해서 옮겨 놓았고, 그 외곽에는 티베트 라사의 포탈라궁 등을 축소해 놓은 불교사원을 건설했다. 팔관외묘라 불리는 티베트 사원은 청나라가 소수민족 그중에 티베트불교에 얼마나 호의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되돌려 말하면 티베트와 티베트 불교를 믿는 북방의 소수민족들을 두려워 한 것이다.
 
청나라 황제는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인 판첸라마를 자신보다 더욱 높이 인정하고, 공경했다. 신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던 실학자이었지만, 연암도 종교에 있어서만은 어쩔 수 없는 성리학자 이였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 선비가 북방 소수민족의 스님 ‘판첸라마’에게 예를 표해야 했던 곤혹스러운 장면은 열하일기에 생생히 묘사 돼 있다. 하지만 연암은 당혹스러움 속에서도 청나라가 소수민족 통치를 위해서 어떻게 종교를 대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기록했다.
 
왜 청나라가 티베트 불교를 이처럼 숭상했는지는 티베트의 역사와 영향력을 알아야 한다. 티베트와 티베트인을 현대 중국에 의해 점령당한 소수민족으로만 치부하면 안 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티베트인이 동양의 유대인으로 느껴진다. 불교라는 강력한 믿음, 뛰어난 머리와 적응력은 유대인을 능가한다고 여긴다.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종교성은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극대화 된다. 사막 유대인들의 유대교가 기독교, 이슬람교의 원류 이듯이, 티베트 불교는 몽고 등 그 지역 종교와 문자에 원류라고 할 수 있다. 히말라야 고산지대 은둔의 땅에 살았던 티베트인들은 인도에서 불교가 전래된 이후 토속신앙과의 조화를 거쳐 티베트 불교를 발전 시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역경사업을 위해 티베트 문자를 만들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를 연구한 후 창시된 티베트 문자는 산스크리트어의 데바라나기와 비슷하나 문법과 체계는 그들만의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언어이다. 티베트문자는 그 후 몽고와 만주문자 등에 영향을 미쳤고, 티베트인들이 믿는 불교, 즉 '밀교'는 몽고 등 티베트 인근으로 확대 됐다. 
 
일부에서는 이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라고 불렀는데, 이는 무지의 소산이다. 티베트 불교는 인도 본토에서 이슬람에 의해 불교가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을 때, 수많은 스님들이 경전을 가지고 히말라야를 넘어 가 시작됐다. 티베트 불교는 인도불교의 법맥을 계승한 탄탄한 교학체계를 갖춘 대승불교다. 다만 티베트 불교는 부처님과 법, 스님 곧 불법승 삼보에 하나를 더 해 '사보'를 숭상한다. 바로 ‘라마’ 환생을 한 스승이다. 한때 서양인들은 티베트불교는 부처님이 아니라 라마를 숭상한다고 오해를 해서 티베트불교를 라마교로 불러왔으며,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있기는 하다.
 
환생자 ‘라마’를 이상하게 여기는 서양인들이 많고, 한국의 불자들 중에도 일부는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의 교학 이수기간은 20년에 달하고 그 과정 또한 매우 힘들다. 무엇보다 논리를 중시하는데, 인도에 한 달 동안 배낭여행을 하다가 다람살라에 일주일 정도 머문 적이 있다. 그때 낮이면 어린 티베트의 학인 스님들이 마당에 나와 서로 짝을 지어 몇 시간 씩 불교교리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며 그날의 공부를 정리하는 걸 보곤 했다. 티베트 불교는 험준한 고산지대에서 생사에 여여 했던 강인한 민족성이 반영된 불교인 것이다. 일본의 사찰이 신사 인근에 건립됐고, 중국의 선종이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과 비슷하다.
 
연암 박지원이 다녀온 피서산장은 황제의 여름 별장이 아니라, 소수민족들에게 유화정책을 폈던 현실 정치의 각축장이었다. 명나라를 따르고 청나라를 배척했던 조선의 사신들은 베이징의 자금성이 아니라 열하에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힘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외국 사절들은 이를 통해 중국이 한족만의 나라가 아니라 여러 민족이 하나가 돼 이룩된 나라임을 체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연암은 청나라의 그러한 의도와 자신의 사상을 열하일기를 통해 전했다.
 
세월은 열하의 물길처럼 흘러 흘러, 중국의 역사는 또 변했고, 청나라가 두려워하고 유화정책을 폈던 티베트는 현대 중국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 당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중국을 떠난 달라이라마와 티베트불교는 전 세계에 퍼졌고, 이제는 세계 불교계의 주류로 우뚝 솟았다. 앞서 언급한 '정'과 '반'을 불교적으로 풀이하자면 ‘원인’과 ‘결과’ 즉 ‘인과’일 것이다. 중국과 티베트와의 갈등과 조화는 역사를 반복하며 진행 중인 것 같다. 요즘 중국 내부에서 대두되고 있는 티베트, 위그르 등 소수민족과의 갈등은 어쩌면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장 피서산장 '열하'에 그 해답이 이미 나와 있는 것 같았다.
 
‘제행무상’ , 모든 것은 변한다. 중국 대륙을 차지한 주인이 바뀐 혼란의 시대, 새로운 세상, 새로운 조선을 열망했던 연암의 바람은 아직도 열하의 뜨거운 물길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를 사는 후손들은 더욱 더 빨라져 예측 불가능하고, 현기증 나는 속도의 변화 속에서 개인과 조직, 국가, 세계의 변화에 연암보다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변화를 목격하고 변화를 발전으로 이끌고자 했던 열하의 열기는 세대를 가로지르며 더욱 뜨거워 지고 있는 것 같다.

홍진호 기자 / jino413@dreamwiz.com

홍진호 기자  jino413@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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