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상트는 물의 도시다. 네바 강 하구 삼각지가 잉태한 수많은 자연 섬과 운하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수백 년 전 도시를 짓기 위한 표트르 대제의 가혹한 폭정으로 습지로 내던져진 노예들의 영혼은 이곳을 근현대까지 도도한 혁명의 도시로 만들었다.

지난해 이맘때, 이 곳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잘나가는 국가들의 수장 20명이 모여 세상사를 논했다. 음흉한 속물 정치꾼들의 이런 모임은 언제나 요란스럽지만 실속이 없다. 알맹이 없이 서로 듣기 좋은 얘기들만 되풀이 하다 사진 찍고 서둘러 헤어진다. 아빠는 이 모임을 취재하기 위해 우리 대통령을 따라 이곳에 왔다 예정일보다 빨리 나온 너의 탄생 소식을 처음 듣게 됐다. 흔히들 첫 아이를 보면 뛸 듯이 기쁘다고 하는데 거짓말인 듯하다. 기쁘다기보다는 놀랍고 신기하고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처음 맞이한 내 핏줄에 대한 감흥은 그렇게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저 먹먹할 뿐이었다.

그러나 며칠 전 돌을 맞이한 너의 지난 1년은 아빠에게 분명 기쁨이었다. 인간이 태어나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의 가장 큰 절정이었다. 네가 울고 밀고 기고 걷을 때, 아빠의 모든 감정은 오롯이 흥겹게 춤을 췄다. 모유를 먹고 분유를 먹고 이유식을 먹고 급기야 아빠가 먹고 있는 생크림까지 그 작은 손가락으로 몰래 찍어먹을 때, 아빠는 그저 울고 싶었다. 소리 지르다 옹알이하다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말하려는 너를 보며 아빠는 기도한다. 제발 이 행복을 깨지 말아달라고.

하지만 딸아, 네가 그토록 서둘러 만나고 싶어 했던 세상은 결코 아름다운 곳만은 아니란다. 특히, 너의 조국의 지난 1년은 참담했다. 올 봄 이 나라는 사실상 국상(國喪)이었다. 4월 어느 날 아침, 바다는 피지도 않은 수백 명의 아이들을 마구잡이로 삼켰다. 어른들 말만 믿고 눈을 뜬 채 바다 속으로 사라진 아이들을 단 한명도, 정말 단 한명도 구하지 못했다. 그 어른들은 자기만 살겠다고 가장 먼저 도망쳤다. 여의도의 또 다른 어른들은 아이들이 왜 그렇게 죽어야만했는지 밝혀내겠다며 주접스럽게 모였다가 아직까지도 진흙탕의 개싸움만 하고 있다. 대통령은 울고 장관은 얻어맞고 이 나라의 자식가진 이들은 모두 다 죄인이 돼 아이들에게 하얀 국화꽃을 바쳤다.

한바탕 수장의 탈당쇼를 겪었던 제1야당은 대통령이 울지만 말고 적극 나서라고 독려하고 있지만 대통령은 원칙과 근간을 강조하며 거부하고 있다. 사실 대통령이 나선다고 해결될까싶다. 언젠가부터 우리 대통령은 ‘무엇을 해도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 오명 속에 살아가고 있다. 만기친람(萬機親覽)과 조급증, 툭하면 나오는 ‘남 탓’을 질책이라도 하듯 운마저 안 따라준다는 얘기다. 난데없이 '잃어버린 7시간' 논란에 휩싸여 악랄한 이웃나라 보수언론의 악의적 도마 위에 올랐다. 물론 대통령이 나서라는 요구도 사상 최악의 콩가루리더십을 연출한 제1야당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초등학생들처럼 전수(全數)조사나 계속 할 일이다.

딸아, 이런 이 나라의 위정자(爲政者)들과 방송연예인들은 묘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공공의 자산을 사사로이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몇 달째 천상에서 노닐며 오로지 싸움질만 하면서 수십 억 원의 국민혈세를 탕진하고 있는 국회의원들이나 십 수 년째 여기저기 늘어난 채널에 옮겨 타며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먹고 놀면서 공공재인 방송전파를 갉아먹는 일부 예능인들은 닮지 않은듯하면서도 정말 많이 닮았다.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국민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기 위해서라고 떠는 것까지 돈독한 이란성 쌍둥이 같다. 저렇게 많은 정치인들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못하며 빈둥거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이렇게 많은 채널들 중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을까라는 생각은 어느덧 같은 색깔로 아빠의 머릿속을 주유(周遊)하고 있다.

딸아, 천7백만 명이 넘게 봤다는 우리 영화가 나온 것은 우리 영화계의 쾌거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정말 보고 싶어 본 것이 아니라 상영관에 걸려 있는 영화가 그것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봤다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스크린 독과점 문제는 언젠가 우리 영화계를 세월호로 만들 것이다. 사실 아무리 관객이 많이 들어도 돈을 버는 것은 영화인들이 아니다. 제작과 배급, 유통망을 독점한 대기업들은 오늘도 자기들 배는 불린 채 헐값에 영화표를 나눠주고 팝콘 팔아 돈을 벌고 있다. 차라리 아빠 어릴 적, 한 번에 두 편씩 보여주던 동네 동시상영관이 그립다. 속칭 ‘3류 영화관’이라고 늘 손가락질 당했지만 날 잡아 부지런히 동네 한 바퀴만 돌면 저렴한 가격에 참으로 다양하고 수준 높은 영화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딸아, 이제 네가 살고 있는 세상의 악마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푸른 옷을 입고 사람을 죽을 때까지 때린 악마들과, 어린 소녀를 성(性)노리개로 매매한 뒤 시멘트를 발라 죽인 악마들이 그들이다. 윤 일병은 죽는 순간까지 살려달라고 했다. 토사물과 끊은 물로 잔혹한 고문마저 당한 김해 소녀는 그 순간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백 번을 양보하고 천 번을 곱씹어도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는 지 솔직히 살의(殺意)마저 느낀다. 이런 악마들에 비하면 바다 건너 길거리에서 음란행위를 하다 걸린 검사장 아저씨는 차라리 불쌍하고 측은하다. 어찌 보면 지독한 병에 걸려 아픈 사람일 뿐, 남들에게 고통을 주며 해코지 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온 나라를 들끊게 했던 망신살로 죄 값도 충분히 치른듯하다.

나의 딸이 잠들었다. 세상이 다 조용하다. 무슨 꿈을 저리도 맛있게 꾸는지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가득하다. 이런 기막힌 세상에서 살아갈 너의 수많은 날들을 생각하면 아빠는 벌써부터 가슴이 미어진다. 도처에 도사리고 있을 삿된 불의(不義)와 부조리가 얼마나 너의 삶을 힘겹게 할지, 얼마나 많은 고뇌의 밤이 너의 아침을 슬프게 할지 아빠는 지금부터 몸서리쳐진다. 그래도 사랑하는 나의 딸아. 오늘 밤만큼은 사나운 꿈에 뒤척이지 말고 편히 잠들거라.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파란 수족관 속 ‘끙끙이’가 돼 한 손에는 노란 크레용을, 또 한 손에는 뽀로로 숟가락을 쥐고 똥꼬나라의 무지개동산을 마음껏 넘나들어라. 너의 아빠라서 참 다행이다. 살아갈 가장 중요한 이유를 얻었으니. 부디 천천히 자라다오. 언제까지나 딸바보로 늙어가고 싶으니.
 
 
 

 
 
 
 

양창욱 / wook14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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