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의 수명도 무척 길어졌습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일반 백성들의 수명은 스물네 살 정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서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건강에 특별히 신경을 썼던 임금은 마흔일곱이 평균 수명이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평균 여든 살을 사니 수명이 두 배에서 네 배 가까이 늘어난 셈입니다.




  그렇다보니 학업에 매진하는 기간도 길어졌고,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는 시기도 많이 늦추어졌습니다. 즉, 조선시대 백성의 1년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2년~3년에 해당한다고 하면 억지일까요?





  동일한 기간이라도 자신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가에 따라 하루하루에 부여하는 의미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하루는 지루할 때도, 무척 빠르게 지나갈 때도 있습니다. 반면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에게 오늘 하루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분명 동일한 무게는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유래된 말 중에 ‘찰나’가 있습니다. 지금의 시간으로 따지면 75분의 1초에 해당됩니다. 1초 안에 75찰라가 들어있는 셈인데, 우리가 보는 텔레비전의 영상이 1초당 30장의 필름이 돌아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끝없는 윤회를 거듭하는 중생에게 있어 잠시 머물다가는 현생은 어쩌면 찰나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윤회가 반복된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다음 생에 대한 두려움이 몸에 와 닿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하루, 올 일 년, 이번 생에 대해 절박함을 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번 생이 사람으로 태어나는 마지막 생이라면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삼국유사’에 ‘조신의 꿈’이란 이야기가 전합니다.


  신라 때의 승려 조신이 사찰에 온 태수의 딸에게 반해 그녀와 자식까지 두었습니다. 40여 년을 살다가 자식이 죽는 등 일을 겪으며 뒤늦게 인생의 덧없음을 깨달았는데 그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법당에서 종을 한번 울리는 사이에 졸면서 꾼 꿈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이렇게 ‘찰나’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조신이 꾼 그 꿈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 이 하루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에 집착하지는 않더라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신과 같은 허망함을 느끼지 않으려면 매 순간 수행과 정진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보시를 통한 공덕 쌓기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2009년이 밝았지만 경제 전망은 어둡습니다.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더욱 힘들어질 듯합니다.


서로 돕고 격려하면서 난국을 헤쳐 나가도록 노력합시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월도스님( 천태종 총무원 사회국장)



*이상은 1/14 논평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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