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아무래도 평화롭지 못한 삶을 살아야 하는 중생들은 현재의 삶을 부정하고 떠나야 할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덧없음을 생각하고 수행을 통해서 영원히 사는 삶을 도모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삶은 중생의 상태로 있는 한  불가능하고 그것은 깨달음을 얻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불교수행의 최고 목적은 수준 높은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 태어나지 않음을 아는 것입니다.




  요즘 관심 있는 위빳사나를 수행하거나 한국불교에서 전통적으로 수행해 온 화두참선이나 염불선 그리고 경전독송을 통해 마음속에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세 가지 독한 때를 벗겨내면 가능하다고 부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회를 가졌거나 가지지 못했거나 많은 사람들이 중생의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과거에 죽음은 우리가 평생 살았던 삶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웰비잉 즉 잘 사는 것에 관심을 쏟더니 그것은 웰다잉 즉 잘 죽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결론을 얻은 듯합니다. 불교의 표현에 의하면 삶과 죽음이 동전의 앞과 뒤처럼 하나이고, 더 나아가 생사와 열반이 하나라는 것이지요.




  원효종 종정을 역임하신 법홍 큰스님이 열반하실 때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거부하고 한 달여 동안에  지인들을 불러서 당부하고 다 만난 뒤에는 스스로 곡기를 끊고 열반하셨습니다. 재가자로서 한국불교 교육발전에 크게 기여한 동산반야회 김 재일법사도 암으로 죽음이 임박한 것을 깨닫고 역시 뒷날을 부탁하고는 태연히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래서 혼란 없이 동산반야회가 좋은 교육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어찌 죽음이 그리 쉬웠겠습니까만 그래도 불교를 공부하고 웰빙과 웰다잉을 가슴 깊이 생각해 본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나름대로 판단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조사열반을 한 것입니다.




  며칠 전 법원에서 인간과 생명의 존엄을 인정하는 죽음을 맞이하라는 ‘존엄사’판결이 있었습니다.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분야에서 좀 더 진지하게 토론을 해야겠지만 보다 기본적인 것은 “자연스레 살다가 평화롭게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 등을 통해서 겨유 생명줄을 유지하는 것은 삶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능동성과 평화로움을 해치는 것입니다. 자연스레 살다가 평화롭게 죽을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인 합의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존엄사를 하겠다는 의사표시를 사전에 가족과 의료진에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스레 살다가 평화롭게 죽으며 옆 사람에게도 평화를 주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법현스님(열린선원 원장, 불교방송 객원논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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