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 : 김진희 대불련전법지원단장

●연출 : 김종광 기자

●진행 : 이병철 방송부장

●2021년 12월 09일 제주BBS ‘아침저널 제주’

(제주FM 94.9MHz 서귀포FM 100.5MHz)

●장소 : BBS제주불교방송 / 제주시 임항로 14(덕산빌딩 4층)

[앵커멘트]

제주의 다양한 관심사를 보다 심층적으로 알아보는 ‘집중인터뷰’시간입니다.

과거를 잘 아는 것은 미래로 나가는 든든한 바탕이죠. 불자들의 지금에는 불심을 채우고 부처님 가피를 느끼던 과거 어느 때가 있습니다.

당분간 이 시간 우리의 그 때를 돌아보려고 하는데요. <그땐 그랬지, 우리의 부처님 오신날>이라는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첫 순서로 1980년대 한국대학생 불교연합회 활동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셨던 김진희대불련전법지원단장님과 만나봅니다. 안녕하십니까?

[김진희]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이병철]만나서 반갑습니다. 먼저 방송을 듣고 계신 도민들, 도반들과 옛 동기들에게도 인사해주시지요.

[김진희]여러분! 안녕하세요? 코로나의 기세가 아직도 여전해서 걱정이 많습니다. 먼저,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에서도 오늘 하루를 버텨내는 모든 분들께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힘내세요.

시작 전에 사회자님의 짧은 한마디가 저의 마음을 울리게 하는데요. 과거를 잘 아는 것은 미래로 나가는 든든한 바탕이라는 말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방금전에 사회자님께서 저를 소개할 때 대불련전법지원 단장님이라고 하셨는데, 단장이라고 하니까 거창해 보이지만 전혀 그런 것은 아니고요. 다만, 제가 하는 역할은 젊은 대학생들과 불교, 그리고 동문들 사이에서 연결하는 가교역할 정도 하고 있습니다.

[이병철]최근에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계속 연을 이어가는 분도 계시겠지만 궁금해 하는 분들도 많겠습니다.

[김진희]2014년부터 시작한 대불련 재창립의 발걸음이 2017년도에 어렵게 대불련 제대지회와 교대지회가 학교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동아리로 인준되었고, 2018년 3월 26일에 보리도량에서 「참 나를 알고 나눔을 실천하는 대불련 재창립법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학생들 스스로 회비도 내고 집부회의도 하면서 동아리를 운영하더라구요.

아 이제는 스스로 하는구나 하면서 마음을 놓는 순간 작년 2월 초부터 코로나라는 복병을 만나게 되어 잠시 주춤한 상태이긴 하나 그 와중에서도 줌으로 온라인 법회도 하고 선배와의 대화 등을 하면서 나름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병철]우리 프로그램의 특성상 많이들 아시겠습니다만, 그래도 모르는 분, 이제 막 관심 갖는 분들을 위해서 한국대학생 불교연합회, 그리고 제주대불련을 간단히 소개해주시지요.

[김진희]대불련은 말 그대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의 줄임말이거든요. 그 당시 회칙에 이런 문구가 있었어요. 대불련은 종파를 초월하여 어떠한 종파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그 때는 이 말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어떤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모두 어울릴 수 있다는 그 말이 참 포용적으로 와 닿았거든 요.

불교에 관심이 있는 대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종교활동과 문화활동을 함께 했던 동아리라고 할 수 있는데 법회는 기본으로 하고 수련회와 강연회도 하면서 당시의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그리고 대불련 출신 오비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대불련동문회 활동도 거의 30년이 다 되어 가고 있는데 제주지역뿐 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대불련총동문회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불련은 벌써 창립 57년째에 접어들고 있네요.

제가 대불련 재창립에 정성을 쏟았던 이유는 세대를 초월하여 대불련 동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대불련동문회도 기금이 별로 없는 상태여서 힘든 부분이 많았으나 뒤에서 소리 없이 도움주시는 동문회 선배님들이 계셔서 대불련 재창립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사회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과거를 잘 아는 것이 미래를 든든하게 한다는 바탕이라는 말이 딱 맞는 말입니다. 대학생 때 대불련 활동을 통해서 쌓아진 내공이 중간에 사라졌던 대불련을 다시 한곳으로 모으는 역할을 할 수 있었거든요.

[이병철]대불련 제주에서는 대외홍보협력부활동과 더불어 전법지원단장으로서 활동하고 계신데~ 최근에 어린이포교를 비롯해서 청년포교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고 계신지요~

[김진희]저는 대불련활동을 지금까지 하면서 이것만은 꼭 다시 할 수 있도록 하겠다라는 원을 세웠습니다.

무엇인지 궁금하지요? 그것은 다름 아닌 대학생때 대불련 활동을 하면서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제등행렬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일정한 곳에 탑동광장이나 시민회관쪽 로터리 부근서 하얀 한복을 입고 연등을 들고 율동했던 연등무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온전히 학생들의 노력으로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연등으로만 들고 했는데 사실 여기서 연등의 의미는 연꽃으로 만든 연등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불을 밝힌다는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등회하면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을 본따 만든 등을 들고 행렬하는 것으로 많이 알고 있더라고요. 사실 연등회는 불을 밝히는 모임입니다.

연꽃 모양만이 아니라 다양한 모양의 등으로 불을 밝힌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나요? 저마다 만든 등으로 이웃의 행복을 바라는 특히, 지금의 상황에서는 코로나가 멈춰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연등회를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이런 활동을 하다보면 저절로 청년포교도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대불련 재학생들과 동문들이 기쁨으로 하나가 되는 연등회로 마음이 모아져서 제주도내의 불교계에 울림을 주는 날을 기대해봅니다.

[이병철]이렇게 사회인이 된 후에도 동문으로서 열심히 활동할 수 있는 동력...그 깊은 불심의 뿌리를 살펴볼까요? 처음 불교와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김진희]저는 대학교 1학년 때 대불련동아리를 모집한다는 포스터를 보고 무작정 동아리방을 찾아갔습니다. 그 때까지 불교와의 인연이라고 하면 부모님 따라서 초파일에 가서 등을 켠 일이 일이 전부였거든요.

기본적인 불교의식이나 예법도 거의 몰랐구요. 그러다가 2학년 때 4개 대학 연합으로 동아리 MT를 사찰에 갔는데. 그 때 처음 발우공양도 해보았고 108배와 1080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108배도 처음 하는 거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도 어찌 어찌 참으면서 했는데 1080배는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습니다. 5백배 정도까지는 의식이 있는 채로 했다면 그 이후에는 정말 무의식적으로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차라리 수련회에 참여하지 않을 걸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수련회 이후로 대불련활동을 더 열심히 하게 되었고 조천 고관사에 가서 매주 일요일에 있는 어린이법회 운영에도 작은 도움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때 계셨던 도림스님이 그리울 때가 많습니다. 오로지 불심을 키우기 위한 어린이불교 활동이나 법회에 진짜 본보기가 되셨거든요.

[이병철]자연스럽게 단장님과 동문들의 대학시절도 궁금합니다. 80년대 중반이었지요, 당시사회 분위기와 제주도내 불교계 상황은 어땠습니까.

[김진희]그 당시는 사회적으로 혼돈의 시절이었고 특히, 정치적인 이야기는 지금처럼 나는 누가 좋고 누가 나쁘다 등 대놓고 말할 수 있거나 이념적인 도서들도 마음 놓고 읽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 순이삼촌이라는 소설을 읽을 때도 책표지도 감추고 몰래 몰래 읽었고, 양희은의 아침이슬도 마음껏 부르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씁쓸했던 시절입니다.

그당시 불교계에는 재가불자들의 희망터이자 안식처인 포교당이라는 곳이 중앙로에 있었습니다. 발길이 닿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거든요.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그 곳에서 불어터진 라면을 30개를 한꺼번에 끓였으니 오죽 하겠습니까? 먹으면서 연등무를 연습했던 일입니다.

전문적으로 지도해주는 전문강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끼리 머리를 맞대어 찬불가의 노래에 맞추어 동작을 만들면서 연등무를 연습했었죠. 연등을 들고, 하얀 한복을 입고 부처님오신날 전날에 축하공연을 했습니다. 한 해는 비가 와서 한복이 비에 다 젖었지만 연등무를 추는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가 너무 너무 좋았습니다. 다시 연등무를 할 수 있는 동력과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포교당이 시내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런 원력을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철]최근에는 코로나 사태로 사회전반이 위축되어있습니다. 법회를 여는 것도, 불가의 가장 큰 행사인 부처님 오신날을 축하하는 일도 상당히 조심스러워요. 지금 세대들이 경험하지 못한 그 시절 부처님 오신날 좀 말씀을 통해서 머릿속에 그려주세요.

[김진희]저희들이 대학생활을 했던 80년대는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는 연등회가 거의 축제 수준이었습니다. 도내 곳곳의 사찰에서는 오색 연등이나 장엄등을 만들기에 바쁘고 애향운동장에서 출발해서 탑동 광장까지 가는데 길거리에 나와서 구경하는 도민들도 많았고 관광객들도 참 많았습니다. 박수도 많이 받았습니다. 플래시를 터뜨리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도 많았고요.

종교를 초월해서 온도민의 축제라고 해도 될 만큼 사람들의 반응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제주도내의 사찰에서 대부분 참여했기 때문에 규모가 지금보다 더 컸었거든요.

교통이 한쪽만 통제된 게 아니라 어느 시간대는 아예 전면 통제될 정도로 참여인원이 많았거든요. 교통이 통제되어 불편함이 컸을텐데도 누구하나 이게 뭐냐고 호통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연등행렬 자체를 불교의 장엄한 의식을 넘어서 문화로 생각해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워낙 행렬이 길어서 3시간 이상 소요되는 그 행진도 결코 지칠 줄 몰랐거든요. 아마 지금 세대들에게는 낯선 풍경일지도 모릅니다. 뭐 하러 다리 아프고 몇날 며칠 손에 풀을 묻히면서 연등을 만들어야 하나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고 우리가 옳고 지금 세대들은 그르다라는 말을 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세대 차이, 문화적인 차이가 바로 시대의 흐름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좋은 점도 많더라고요. 변화에 발 빠르게 움직이고 SNS활동 등에도 능하고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잖아요.

[이병철]대학생 김진희와 그 시절 제주대불련 학생들도 큰 역할을 했을거라 생각합니다. 특히나 축제의 장에 젊은이들의 열정이 빠질 수 없죠.

[김진희]예전에는 각 학교별로 축제기간에 동아리방에서 불구 및 서화 전시회를 하기도 했거든요. 학교에서 막걸이에 파전까지 파는 일일 찻집도 운영했거든요.

저도 당시에 교대에 가려면 당연히 붓글씨를 배워야 하는 줄 알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청청서예학원도 열심히 다녔어요. 그때 배운 실력으로 반야심경을 탑모양의 글씨로 완성했는데 지금 쓰라고 하면 엄두도 나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제대지회나 한라대지회, 제주전문대지회 축제도 마치 우리학교 축제인 양 참여했던 일이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이병철]특히 당시에 연등무도 준비하시던 이야기도 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김진희]연등무란? 연등무는 말 그대로 연등을 들고 춤동작을 하면서 삶의 어둠과 고통대신에 지혜와 자비가 충만하길 기원하는 의식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대불련은 제주대지회, 교대지회, 한라대지회, 제주전문대지회 4개지회가 지회활동은 물론, 연합으로 하고 있었는데 연등무는 지부활동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당시는 무용학원이 희귀했던 터라 전문가의 손길을 받기는 힘들었죠. 몇 개의 대형을 생각하고 찬불가의 노래에 맞춰서 율동을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맞았는지 틀렸는지도 몰라 헤맬 때도 많았지만 곡하나가 거의 완성될 때의 기쁨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포교당 마당에서 연습하고 있으면 지나는 사람들이 뭐 햄신고 하면서 고개를 내밀기도 했었지요.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선배님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스님들의 격려가 컸습니다. 못하는데도 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게 맞는거 같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이런 연등무가 언제부터인가 우리들 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번주 토요일 오후 2시에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하는 제주 연등회 활성화 방안 세미나가 있는데요. 혹시 시간되시는 분들은 참여하셔도 좋을 듯 합니다.

[이병철]이런 기억과 인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지금을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하겠습니다.

[김진희]우리는 빛을 찾는 나 젊은 구도자다. 불-타의 혜명 받아 한 마음 손을 잡고 시방에 가이 없는 중생들을 위하여- 이런 대불련가가 저절로 나오네요.

1600년 대회 번뇌에 얽힌 세속의 인연을 버리고 수행생활을 한다는 의미에 참가했고, 산상법회도 한라산에 가서 했던 기억도 있고요.

그리고 1985년 제가 대학교 2년 시절 시민회관에서 서정주 시인을 모시고 강연회도 들었는데 생각보다 말씀은 별로 못하셨지만 그래도 국화 옆에서 시를 직접 들을 수 있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해 부처님오신날에는 비가 왔는데 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산 쓰고 제등행렬에 참여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그때는 선배님들은 영원한 물주였거든요. 무엇이 먹고 싶다고 전화하면 한걸음에 달려와서 기꺼이 사주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거꾸로 선배들이 먼저 후배에게 전화를 해야 겨우 만날 수 있습니다.

다른 건 변해도 이것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재학생 대불련 후배님들! 언제든 전화주세요. 어려워하지 말고요. 무조건 달려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참! 농촌 봉사활동도 갔었어요. 일도 못하면서 대충하다가 마을 어르신한테 혼난 기억도 있고 그러면서도 수고했다고 고구마를 잔뜩 가져다 준 일도 있습니다.

1985년도에는 법주사에 전국수련대회도 다녀왔습니다. 눈도 많이 내려서 절에서 행사하는 것보다는 마냥 눈이 더 좋았던 시절입니다.

1986년 8월에 직지사에서 열린 전국 1600년대회에 갔는데 파란 단체티를 주더라고요. 그때는 단체티가 처음이라 3박 4일 동안 내내 그 파란색 티만 입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더운 여름에 빨지도 못해 냄새도 많이 났을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입었네요.

그리고 새벽에 울력을 하는데 비질하는 스님이 보이길래 안녕하세요? 하면서 큰소리로 인사했다가 되러 신나게 혼이 났습니다. 부처님께 예를 올리기 전에는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정말 철이 없었네요.

그 당시에 법문해주신 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엇하러 여기에 왔으며 여기에 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를 늘 고민하면서 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남에게 무엇을 받을 것이냐를 생각하기 전에 내가 남에게 무엇을 줄 것이냐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평범하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 같습니다. 누구에겐가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쓰다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아름답고 의미있는 세상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이병철]지금의 청년세대들, 대학생들을 포함해서요....종교자체에 무관심하다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이를 보면서 안타깝다던가 또한 선배로서 길을 열어주고 싶기도 하지요?

[김진희]생각의 차이인거 같습니다. 재학생 후배들 중에는 나름대로 불교 활동 열심히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대불련이어서 자연스럽게 불교를 접했다는 후배도 있고요.

간혹 생각이 복잡할 때는 법당을 찾아서 명상을 한다는 후배도 있습니다. 불교활동은 누가 시켜서 하는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때 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지금 현재 코로나 상황이긴 하지만 간간이 어린이 법회를 열심히 참여하는 후배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대지회 후배 중에 충남지역 유일의 불교 사립고등학교인 보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배도 있습니다. 그 후배를 통해서 보문이라는 이름이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의 합성어라는 사실을 알기도 했습니다. 그 후배는 고등학교때부터 자연스레 불교를 몸으로 접하며 법당에서 학교 법사님과 함께 명상활동과 300배를 하며 심신을 단련 했답니다.

이런 점들을 보았을 때 오히려 우리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주변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대불련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그 후배는 올해 임용시험을 보는데 꼭 합격하길 소원합니다.

[이병철]이렇게 나오셨으니까, 많은 분들, 특히 인생후배인 청년들에게 힘이 될 만한 경전이나 부처님 말씀 하나 전해주신다면.

[김진희]저는 평소에 자주 새기는 부처님 말씀중에 문수보살 게송을 좋아합니다.

성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이구요.

부드러운 말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이병철]우리에게 제주대불련 활동이 주는 의미, 어떤 역할이 되었으면... 어떤 마음으로 임하겠다...혹은 더 하시고 싶은 말씀으로 인사 나누겠습니다.

[김진희]재학생 대불련이 재창립된 2018년 3월 26일부터 지금 현재까지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예상치 못한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행사가 많이 축소또는 취소되는 상황에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비대면으로 소원등을 접수 받아 학교 정문에 전시하는 등 비대면 활동도 꾸준히 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저역시 후배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너튜브를 활용한 법구경 읽기, 줌으로 불교 서적 읽고 의견 나누기, 줌으로 선배와의 대화 진행이나 온라인 법회 등을 통해서 청년불자들에게 꾸준히 다가가겠습니다.

동아리방에 모셔진 부처님의 미소가 사라지지 않도록 템플스테이는 기본으로 사찰의 기본 예절도 익히면서 일상에서 자비로움을 나누는 그런 청년불자로 거듭나면서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교내에 봉축등을 직접 만들어 매달고 달았던 그 등을 들고 소박한 연등무를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긴이야기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병철]<그땐 그랬지, 우리들의 부처님 오신 날> 첫 시간이었습니다. 제주의 불교역사를 돌아보고 또한 젊은 불교를 되살리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함께해주신 김진희 제주대불련 전법단장님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활동 응원합니다.

[김진희]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