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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 전법후원국장

출연 : 노승대 작가(조자용기념사업회 이사)

방송 : 2020년 12월 6일(일요일) 저녁 6시20분(BBS 라디오)

 

김봉래 : 우리 사회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 진행을 맡은 김봉래입니다. 불교계의 출판 시장이 어렵다 이런 이야기는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보면 좋은 책들이 꾸준히 선보이고 있습니다. 올해도 불교 관련 출판물 가운데 우수한 작품에 선사하는 불교출판문화상이 시상되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전통사찰이죠. 사찰 전각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각종 동식물과 상징물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가 올해 불교출판문화상 대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래서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저자이신 조자용기념사업회 이사이신 노승대 작가님 모시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김봉래 : 예. 앞서 소개해 드린 대로 이 자리에는 노승대 작가님 모셨습니다. 조자용 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계시고 또 한울문화원 원장 소임도 맡고 계십니다. 노승대 작가님 안녕하세요.

 

노승대 : 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김봉래 : 먼저 올해 불교출판문화상 대상 수상을 정말 축하드립니다.

 

노승대 : 예. 감사합니다.

 

김봉래 :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 아주 이색적인 제목입니다. 제목부터. 이게 사실은 지난해 출간이 된 거고 올해 세종도서로 선정되셨죠. 이래저래 상복이 있으신데 수상 소감을 먼저 한 번 주신다면요.

 

노승대 : 필자로서는 다시 말할 수 없는 영광이죠. 아마 평생 한 번 받을 만한 상인데 제가 받았다는 게 큰 영광이고, 또 세종도서로 선정이 되고 대상을 받음으로 인해가지고 이 기쁨을 저는 돌아가신 저의 스승님이신 고광덕 큰스님하고 에밀레박물관을 세우신 조자용 관장님, 평생 동안 우리 문화의 뿌리를 천착하셨거든요. 그 두 분에게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두 분 계셨기 때문에 제가 그런 책을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자 두 분에 관한 이야기는 후반부에 좀 더 나누기로 하고요. 먼저 이 책 참 귀한 책 같아요. 그러니까 사찰의 구석구석 곳곳에 있는 불화라든가 조각이라든가 이런데 나타나 있는 불교의 어떤 모습들, 역사라든가 전설 뭐 이런 것들까지 책에 쭉 서술이 아주 잘 되어 있더라고요. 먼저 어떻게 이런 책을 내셨는지 궁금합니다.

 

노승대 : 제가 이제 금년까지 치면 28년 동안 사람들하고 다녔어요. 공동 답사를. 10년은 박사님한테 배우고 혼자 다니면서 공부를 하다가 10년 후에 1993년에 제가 불광출판사를 맡게 되면서 그 때 바라밀 문화기행이라는 것을 월간지에 쓰고 사람들을 모집해서 다니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다니다 보니까 자꾸 눈에 띄는 거예요. 저런 것들은 왜 절에 만들어졌나. 불교와 관련이 없는 상징들인데. 그런데 쭉 찾아보니까 상징에 대한 해석은 많았어요. 이것이 불교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다 뭐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흘러 왔는지 어떻게 연원이 되어서 우리나라까지 흘러들어왔는지 그것을 밝혀 놓은 책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인도에서 발생해서 우리나라까지 어떻게 건너와가지고 어떻게 변했는지 이런 것을 추적하다보니까 자연히 머릿속에 정리가 되었고, 그러면서 일흔 살이 되면서 이제는 내가 이럴 때가 아니다. 인생을 정리할 때가 되었는데 그래서 퇴직을 하고 앞으로 내가 4~5년 동안은 책 쓰고 또 사진 찍고 운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정리를 해야겠다. 이것이 삼보의 은혜를 갚고 내가 인생을 정리하는 의미가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해서 글을 쓰기 시작한 거죠.

 

김봉래 : 그렇군요. 책에도 보면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공부하는 것을 금생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답사를 하시고 틈틈이 글을 쓰셔서 책을 내시게 된 것 같은데 그 시초가 어떻게 보면 문화답사 모임이죠. 바라밀 문화기행, 그리고 또 인사동에 인사동 문화학교 졸업생 모임인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뭐 이런 회원들과 같이 답사를 계속 다니고 계신가 봅니다.

 

노승대 : 예. 그렇죠. 바라밀 문화기행은 1993년도부터 다니기 시작했고요. 그리고 그 이후에 인사동 문화학교 교장을 맡으면서 졸업생들 모임인 인사모, 그 사람들하고 계속 다녔고, 또 금강정사의 산들문화답사 또 삼양사의 삼양동우회, 여러 팀을 제가 인솔했어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씩 갈 때가 많았어요. 그러니까 한 달이면 네 번을 사람들을 인솔해서 다닐 때가 많았고 또 그 사이사이에 사전답사도 가야하고. 그러니까 직장은 직장대로 다니면서 쉬는 날은 답사를 가는 거니까 집에서 쉬는 날은 한 번도 없었어요.

 

김봉래 : 아. 그러셨겠네요. 가정에서는 불만도 있지 않았을까.

 

노승대 : 불만이 없었어요. 사전답사 갈 때 꼭 데리고 가니까요.

 

김봉래 : 아. 그렇습니까. 양수겹장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책 내용이 궁금한데요, 크게 네 가지 4부로 구성되어 있더라고요, 사령과 사신, 육지와 수중의 생물, 상상과 전설의 주인공, 그리고 꽃과 풀 이렇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네 가지로 나누게 된 그런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노승대 : 네. 그 내용들이 사실은 불교하고 별 연관들이 없는 내용이잖아요. 불교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은 없어요.

 

김봉래 : 그런데 또 저희들은 오랫동안 불교계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불교와 관계 있다고 믿고 있거든요.

 

노승대 : 그렇죠. 그러니까 사신 같은 것도 우리가 매일 학교에서 배우잖아요. 청룡, 주작, 백호, 현무. 사령은 용, 봉, 귀, 린 뭐 이런 식으로 배우는데, 이게 사실은 딱히 불교하고 관련 있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불교에 어떻게 이것이 들어왔나 그것을 추적을 해본 거죠. 특히 사령 사신 중에서 용이나 호랑이 또 거북이 같은 게 많이 눈에 띄는데 호랑이 같은 것도 백호는 사실은 없는 거예요. 옛날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 살아있는 호랑이라고 생각하지만 백호가 나올 확률이 20만분의 1이거든요.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는 사신 자체가 다 상상의 동물이에요. 그런데 절집 안에서는 많이 쓰게 된 건데, 이렇게 나타난 것이 거의 다 조선시대거든요.

 

김봉래 : 아. 그렇습니까.

 

노승대 : 고려시대 건축물이 현재 다섯 개 남아있는데 뭐 다 아시겠지만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이나 조사당, 수덕사의 대웅전, 거조암의 영산전 또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 이런 건데 고려시대 건물에는 건물 안팎에 용이 없습니다.

 

김봉래 : 아. 고려시대 건축물에는 용이 안 나타난다.

 

노승대 : 네. 용이 없어요.

 

김봉래 : 아. 왜 조선시대에 나타납니까?

 

노승대 : 조선시대도 조선시대 전기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임진왜란 후에 나타납니다.

 

김봉래 : 저희는 절에 가면 당연히 용이 있고 그런 것으로 생각하는데.

 

노승대 : 그러니까 조선시대 초기 건물이 강진 무위사에 극락전 같은 경우가 초기 건물인데 없습니다. 용이 이제 수신이잖아요. 물의 상징이니까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이 처음에는 전쟁을 하면서 스님들하고 적대적이지 않았어요. 일본도 불교국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절을 태울 일이 사실 없었죠. 그런데 일본군이 생각도 못한 복병이 있었거든요. 그게 뭐냐하면 의병하고 승병이었어요. 자기네들 나라에서는 군인끼리 싸웠지만 여기에 오니까 의병하고 승병이 일어난 거예요.

 

김봉래 : 세계적으로 없는 일이라고 그러더라고요.

 

노승대 : 그렇죠. 그러니까 난데없는 복병이 나타났는데. 또 승병이 엄청나게 잘 싸워요. 우선 산에 대한 지리가 밝고 쉽게 말해 지금 말로는 게릴라전을 능히 할 수 있는 부대가 된 거죠.

 

김봉래 : 정신 무장도 잘 되어 있고.

 

노승대 : 예. 정신무장도 잘 되어 있고 처자식이 없으니까 죽기 살기로 싸우고, 이래가지고.

 

김봉래 : 위법망구라고 하죠.

 

노승대 : 평양성 전투에서 가장 심한 전투가 모란봉 전투인데 거기에 승병이 싸웠어요. 그리고 중화지역에서 보급물자 들어가는 것을 일본군의 보급물자 들어가는 것을 승병이 전부 끊었어요. 기록에는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그 때부터 승병이 일본군의 위험한 적으로 간주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절을 태우기 시작했어요. 임진왜란 일어나고 1년 뒤부터 절은 보기만 하면 태우기 시작했어요. 승병의 근거지가 되기 때문에.

 

김봉래 : 그래서 그렇게 네 가지 파트로 나눈 이유를 여쭤봤는데요.

 

노승대 : 그렇게 해서 전쟁이 끝난 뒤 절을 복원하니까 목조 건물은 불이 제일 무섭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장치를 하느냐, 이것은 수신을 앉혀야 된다. 수신이 용이니까 건물 안팎에 다 등장하기 시작하는 거죠.

 

김봉래 : 그래서 보면 그런 상상의 동물 또 실제로 존재하는 육지와 수중의 생물 그런 식으로 나름 분류하셨다 그런 말씀이신데. 용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데 사실 사령 또 사신 여기서는 거북, 호랑이, 용 이렇게 세 가지를 들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이 세 가지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이는지 궁금해요.

 

노승대 : 그러니까 사령이나 사신은 모두 상상의 동물인데 그 셋을 절집에서 제일 많이 쓰니까, 제일 많이 들어와 있고.

 

김봉래 : 용 이야기는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은 동양에서는 상당히 용이 이렇게 긍정적인 의미로 알려져 있지만 서양에서는 상당히 좀 부정적으로 알려져 있거든요.

 

노승대 : 용은 성경에서는 드래곤은 거기는 사탄의 생물이에요. 날개가 달렸고 불을 뿜으면서 사람들에게 공포와 고통을 주는 존재로 인식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항상 악의 편에 서있어요. 우리가 영화 <반지의 제왕>에 보면 그 나쁜 놈들이 용을 타고 싸우게 되잖아요. 서양영화에는 거의 용이 다 나쁘게 나와요. 그런데 동양 용은 비하고 구름 이런 것을 관장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굉장히 중요한 동물이죠. 그렇기 때문에 좋은 동물로 인식되고, 용수오복이라고 해서 옛날부터 호축삼재 용수오복(虎逐三災 龍受五福), 호랑이는 삼재를 물리치고 용수는 오복을 불러들인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입춘 때 되면 용(龍) 자 호(虎) 자를 써서 대문에 붙여두기도 하고. 그러니까 우리들한테는 좋은 의미로 복도 불러오고 불도 막아주고 또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듯이 뛰어난 사람을 상징하니까 역시 임금도 상징하게 되잖아요. 용안 뭐 곤룡포니 그죠. 용상이니 다 그런 관련들이 있는 거죠.

 

김봉래 :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도 재미난 부분들이 교과서에 흔히 귀면와로 불려온 그 벽사용 얼굴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이게 용면와냐 귀면와냐 뭐 그런 대목도 되어 있더라고요.

 

노승대 :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싸우고 있는 부분이에요. 용면와냐 귀면와냐.

 

김봉래 : 선생님이 보실 때는 어떻습니까?

 

노승대 : 그러니까 저희 스승님도 그랬고 가장 저희가 관심 있게 본 게 백제시대의 귀면와에요. 그게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건데, 지금 보물 제343호거든요. 공식명칭이 연꽃도깨비무늬벽돌이에요.

 

김봉래 : 연꽃도개비무늬벽돌.

 

노승대 : 연꽃도깨비무늬벽돌. 왜냐하면 연꽃 대좌 위에 이 도깨비가 거의 아랫도리만 가린 발가벗은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 있거든요. 그럼 그 도깨비가 왜 연화대좌에 서 있냐. 연화대좌는 불보살님만 앉을 수 있는 거 아녜요? 그럼 받들어 모셨다는 거잖아요. 일반 잡귀가 연화대좌에 올라갈 일은 없는 거니까. 또 하나는 산천 위에 서 있는 거예요. 산천, 산과 들 위에 서 있는 도깨비 문양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것은 산과 들을 보호하는 진호 벽사용으로 만들어진 것 아니냐. 결국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그런 벽사용이었기 때문에 연화대좌에도 올려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거고. 그것이 용의 얼굴 전면상하고 비슷하기 때문에 나중에 습합이 되어서 기와로 나타나고. 기와로 신라시대 귀면와가 유명하잖아요. 그것이 고려,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어진 거고 장승의 얼굴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니냐. 벽사용에는 그것을 차용한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보고 있는 거죠.

 

김봉래 : 그러면 귀면와는 불교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있었다 이런 말씀인가요?

 

노승대 : 그렇죠. 지금 조선시대 밀양이나 영남에 가도 다 있어요. 조선시대 건물에 굉장히 많습니다. 절집에도 많이 있지만 사가에도 많고.

 

김봉래 : 그런데 육지라든가 수중의 생물 가운데서는 어떤 이야기를 좀 하고 싶으실까요? 많은 이야기를 하셔야 하지만 시간이 짧은 관계로.

 

노승대 : 예. 육지나 수중생물 이런 것들도 거의 법당에서는 천장에, 수중생물들이 나타나거든요. 임진왜란 이후에 거의 민화처럼 나타나요. 연꽃 밭 속에 물고기, 자라 하다못해 새우, 거북이 이런 것들이 같이 노니는 게 나타나거든요. 그러니까 물 속 생물들이 천장에 살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자동적으로 화재진압이죠. 임진왜란 때 호되게 불교가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수중생물이 이제 법당에 살면서 법당을 잘 지키라, 화재를 잘 막아달라는 상징이기도 하면서 부처님 법으로 본다면 너희들도 항상 부처님 법을 들으면서 깨달음의 길로 가라 모든 중생들이.

 

김봉래 : 아. 중생구제.

 

노승대 : 그렇죠. 그런 뜻을 같이 담아 낸 거죠.

 

김봉래 : 그렇군요. 그러니까 화재 예방, 중생 구제.

 

노승대 : 큰 목적은 화재 예방이죠.

 

김봉래 : 수달도 그런 이야기죠?

 

노승대 : 수달도 그런 이야기입니다. 지리산 천은사에 있는데. 처음에 수달을 보고 수달인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물고기를 물고 있는 거예요. 물고기를 물고 있네, 그것은 분명히 수달이죠. 지금도 섬진강에 수달이 살잖아요. 천은사 골짜기에도 많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도 수달만 새겨놓으면 이게 도대체 뭔지 모를 수 있다. 그러니까 입에다가 아예 물고기를 물려놔서 수달임을 알 수 있게 해 둔 거죠.

 

김봉래 :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코끼리는 잘 없잖아요. 그런데 코끼리도 등장하거든요.

 

노승대 : 네. 코끼리는 불교적으로 일단은 보현보살이 타는 거죠. 지혜를 상징하죠. 그리고 상서로움을 상징하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호명보살로 계시다가 결국은 여섯 개의 상아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마야부인의 꿈속에 들어가잖아요. 그때부터 이미 옛날에서부터 인도에서는 흰 코끼리는 상징으로 썼던 거죠. 그리고 코끼리가 가장 큰 동물이고 거침없이 나가잖아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그러니까 바로 보현보살이 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보현보살의 상징이 원행(願行) 아닙니까. 요즘말로 하자면 소원하고 행동하는 거잖아요. 행동일치 그런 뜻이니까 그러니까 코끼리를 상징으로 쓰게 된 거죠.

 

김봉래 : 이번에는 상상과 전설의 주인공들 이야기를 좀 봐야 하는데, 거기에 보면 도깨비도 있고 삼신할미 또 악착보살 이런 것도 있어요. 소개를 좀 해주신다면요.

 

노승대 : 예. 악착보살 같은 경우는 한문으로 악자가 이를 악물 악(齷) 자예요. 착자도 이를 악물 착(齪) 자예요. 죽기 살기로 매달린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뭐 흔히 그런 말 쓰잖아요. 악착같은 놈이다. 그게 극락에 갈 때 옛날이야기에 나오듯이 반야용선을 타야 되는데 시간이 늦은 거예요. 집에 잠깐 갔다 오니 배가 떠나니까 누군가 줄을 하나 내려주니 그것을 악착같이 붙들고 극락에 간다고 옛날 기록에 다 나오거든요. 그래서 악착보살을 법당에다가 만들어 놓고 그게 하나가 매달려 있는데도 있고 또 둘이 매달려 있는 곳도 있고 셋이 매달려 있는 곳도 있어요. 보통 악착보살, 악착동자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대개 동자 모습이 많아요.

 

김봉래 : 그렇군요. 어쨌든 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승대 : 그렇죠. 뭐 불교도의 바람이죠. 어떻게든 극락을 가야하니까요.

 

김봉래 : 이렇게 하다보면 사찰 문화 속에는 우리의 전통 정신과 문화도 같이 녹아 있는 거죠.

 

노승대 : 그렇죠.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인 거죠.

 

김봉래 : 그 중에서도 보면 민화가 또 많이 이렇게 사찰 문화 쪽으로 들어오는 때가 있었죠.

 

노승대 : 예. 그럼요. 그게 기준이 언제인가하면 1800년 정조가 죽고 난 다음부터에요. 왜 그러냐면 정조가 죽고 나서 안동 김씨가 장기집권하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백성들이 엄청나게 살림이 곤궁해졌어요. 그러니까 절집도 가난해지기 시작한 거죠. 그러니까 민간에서 유행하는 신앙 이것을 절집에서 받아들인 거예요. 그래서 그러다보니까 풍속도 받아들이고.

 

김봉래 : 그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래야 사람들이 많이 올 테니까.

 

노승대 : 이제 산신, 칠성, 용왕이 들어오고 또 민화가 들어오는 거예요. 민간에서는 그걸 다 즐기고 있는 거니까. 1700년대에 이미 민화가 세간에 다 퍼졌거든요. 그리고 절집에는 안 들어왔던 거예요. 그런데 5,60년 지나면 개채하게 되잖아요. 개채를 할 때는 민화들을 가져다가 곳곳에 배치하기 시작한 거죠. 실제로 1800년대 이전 건물에서는 민화적인 요소가 없어요. 양산 신흥사 대웅전 같은 데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너무 산골이어서 개채를 안 한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옛날 벽화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는 민화적인 요소가 없어요. 또 여수 흥국사 대웅전 같은 곳도 그런 요소가 없어요. 그러니까 1800년대 이후에 들어온다고 보는 거죠.

 

김봉래 : 그런데 그게 어떻게 보면 동전의 양 측면처럼 장단점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대중들의 정서를 담는 것은 좋은데 그렇게 하다보면 불교의 본래 고유한 뜻, 고유한 문화 이런 것들이 조금 변하게 되잖아요.

 

노승대 : 그런데 풍속은 일반 대중들이 선호하니까 그려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니까는 절에 일단 와야, 일단 대중이 와야 불교를 가르칠 수 있잖아요. 친근하게 접근을 해줘야. 그러니까 산신 칠성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불교적으로 또 얼마나 원용이 가능한 게 불보살들은 어떠한 모습으로도 화현으로 나타난다고 했기 때문에 산신으로 나타나든 칠성으로 나타나든 용왕으로 나타나든 아무 상관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은 부처님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이 목적이니까.

 

김봉래 : 아. 그렇군요. 그래서 이제 작가님이 현대에 들어와서 1980년대 이후에 이런 어떤 비불교적인 부분을 좀 지우는 그런 움직임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했던 그런 부분이시군요?

 

노승대 : 그렇죠. 왜냐하면 이미 불교에서 다 받아들여서 불교문화의 한 부분이 되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옛날에는 사대부 문화 그것은 다 기록으로 있어요. 그렇지만 일반 7, 80%의 평민들이 믿고 의지했던 신앙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문자로는 거의 없어요. 그리고 어디에 남아있냐? 그림이냐 조각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것이 다 절집에 남아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후대 사람들도 그렇고 옛날 사람들도 그렇고 옛날의 그런 사람을 보려면 사실 절집의 벽화를 보면 되는 거예요. 거기에 다 녹아있기 때문에. 그런데 새로 개채하면서 비불교적이라고 지우고 불교적으로 바꾸잖아요.

 

김봉래 : 현대적으로.

 

노승대 : 특히 팔상도나 심우도 같은 것으로 벽면을 많이 바꾸거든요. 하면은 그걸로 다 해요. 그래서 있는 것만이라도 다시 개채해도 그대로 남겨줬으면 얼마나 좋은 자료가 되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김봉래 : 그래서 어떻게 보면 앞으로의 세기가 문화의 세기다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관찰해오시면서 뭔가 국가 정책적으로나 뭔가 좀 개선되어야 할 부분 그런 거 느끼신 것은 없으실까요.

 

노승대 : 국가적으로도 개선해야할 점이 있다고 보죠. 왜냐하면 국가에서도 요즘 사찰 복원하고 할 때 많이 지원도 하고 하잖아요. 그런데 좀 장기적인 안목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이 순간에 맞는 그런 것만 맞출 게 아니라 문화적으로. 어차피 정신문화는 시각적인 문화로 나타나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잘 감안해가지고 제대로 된 건물을 짓고 제대로 된 벽화 이런 것을 조성하는 데도 장기적인 안목을 가져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김봉래 : 예. 그렇죠. 요즘에는 또 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에 한 번 촬영을 하거나 자료를 축적하면 영원히 남기 때문에 좋은 자료가 되고 또 자료로 활용이 되고, 또 후손에게도 잘 물려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잠시 여기서 우리 노승대 작가님 인생에 있어서 두 사람 이야기를 간단히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먼저 광덕스님과는 어떤 인연이신가요.

 

노승대 : 광덕스님은 제가 출가했을 때 제 은사스님이시죠. 제가 75년도에 출가했는데 스님께 계를 받고 10년 동안 있다가 승가대학교 졸업하고 있다가 나올 때 제가 환계를 하러 갔어요. 가사장삼을 받들고 제가 환계를 하러 갔어요. 제가 이제 나갑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가사 장삼을 도로 주셨어요. 그러면서 무슨 말씀하셨냐 하면 절에 살듯이 살아라. 항상 수행하면서 자기 점검하면서 남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라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김봉래 : 그렇군요. 평생의 자산이 되셨네요.

 

노승대 : 그리고 박사님은 저한테 문화적인 소양을 키워주신 분이니까 쭉 공부하다보니까 내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일이 뭐가 있나. 내가 문화 답사하면서 느낀 희열, 기쁨 이것을 나눠야겠다. 나만 즐길 게 아니라 같이 나누면 좋지 않겠나. 그래서 답사를 시작하게 된 거죠. 같이 보는 즐거움, 느끼는 즐거움, 공부하는 즐거움을 나누고자 한 겁니다.

 

김봉래 : 그런 성과물이 이렇게 책으로 나왔는데 계속 또 답사를 하실 거기 때문에 하고 계시기 때문에 뭐 또 후속작을 또 기대해도 되겠습니다?

 

노승대 : 후속작은 벌써 써서 넘어갔어요. 그러니까 제일 처음에 쓴 책이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라고 해서 그것은 불교 이전을 쓴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 것은 세간의 풍속이 어떻게 절집에 흘러들어왔고 절집의 것이 어떻게 세간에 흘러들어갔나 이런 내용을 쓴 거잖아요. 수궁가 같은 게 원래 절집의 자타카, 본생담에 있는 건데, 세간에 가서 수궁가가 된 거니까요. 그리고 그것을 쓴 거고, 세 번째는 불교적인 소재로 쓴 건데 제가 다니면서 궁금했던 것, 시왕 많이 보잖아요. 시왕 많이 보는데 49재 지내면 일주일에 한 번 심판 받으면 7명이면 되는데 왜 10명이 되었나 의문이 들잖아요. 또 사천왕은 무장이잖아요? 무장을 하고 갑옷을 입고 딱 무기를 들었는데 머리는 당연히 투구를 써야 하는데 아주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죠. 보살들처럼. 그것이 좀 맞지 않는 구도가 아니냐. 왜 저것을 썼는가, 왜 화려한 투구를 썼나.

 

김봉래 : 네. 그런 것들이 그 다음 책에 나온다.

 

노승대 : 네. 왜 한 발은 들고 있나. 그죠.

 

김봉래 : 그런데 왜 한 발을 들고 있을까요. 사천왕이.

 

노승대 : 다 유래가 있어요. 그것은 이제 제가 미리 이야기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김봉래 : 맞습니다. 다음번에 한 번 더 모셔야겠네요. 그런 면에서는 뭐 불교 종단 쪽에도 뭔가 좀 주문하는 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노승대 : 제가 특히 28년 간 답사를 다니다보니까 일반인이든 불자든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진짜로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그런 분위기를 가진 소박한 사찰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너무 많이 무너졌어요. 다녀보면. 안타깝죠. 중국식의 그냥 성벽 같은 성을 쌓고 또 너무 거대한 집이나 너무 거대한 불상, 산천하고 어울리지 않는 이런 것들 너무 많이 봤거든요. 실제로 그런 예들도 많이 있었고, 수덕사 같은 곳도 지었다가 뜯어내기도 하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이런 것은 전통사찰만이라도 종단 내에서 불사를 할 때 어떤 심의하는 기구가 있어서 거기를 한 번 거치는 게 좋지 않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김봉래 : 아. 그렇겠군요.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은 또 언론사가 많습니다만 불교방송 같은 불교 매체에도 혹시 주문하실 내용이 있으실지요?

 

노승대 : 그런 것을 자꾸 조명해주면 좋겠죠. 문화적으로나 또는 좋은 절들, 그 절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줘서 마음을 안정시키는지 이런 것을 자꾸 소개하고 알림으로써 보는 사람들도 즐겁지만 또 불사하는 스님들도 참고가 되게끔 널리 알려주는 게 방송의 역할이 아닌가, 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김봉래 : 불교가 어떤 불교만의 영역이 있는 게 아니라 항상 세간과 같이 교류하는.

 

노승대 : 그럼요. 어차피 소통해야 하는 거니까요.

 

김봉래 : 그런 점에서 보면 이제 출가의 생활을 또 재가의 생활에서 새롭게 발심 출가한, 출출가를 하신 게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요. 앞으로 어떤 비전 같은 것도 계실 것 같아요.

 

노승대 : 네. 저는 앞으로도 제가 앞에 말씀드렸다시피 우선은 제가 할 일들을 마저 해 놓는다 하는 생각이고. 작업들을 해두면 절에 가시는 분들이 혹여 제 책을 보고 기쁨이 배가 되면 더 좋은 일이고 또 후대에 공부하는 사람들이 제가 쓴 책이 전문적인 서적은 아니잖아요. 일반 대중의 교양서적이니까 공부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나 기초자료가 되면 영광이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우선은 그런 작업을 마무리하는 것이 지금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봉래 : 혹시 심중에 늘 간직하고 있는 부처님 말씀이나 그런 게 있을까요.

 

노승대 : 지금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행복하게 살자입니다.

 

김봉래 :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하게 살자.

 

노승대 : 성철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지옥 극락 다 몽중사다. 꿈속의 일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기쁨을 성취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씀 하셨기 때문에 저도 그게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불교를 배우는 사람의 보람이라고 생각하고요.

 

김봉래 : 예. 알겠습니다. 오늘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노승대 : 예. 고맙습니다.

 

김봉래 : 지금까지 노승대 작가님과 함께했습니다.

 

김봉래 : 네. 여러분 노승대 작가님과 함께 한 오늘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불교와 세간이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왔고 또 하나가 되었다라고 하는 취지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불교의 사회적 역할이 강조되고 있고 또 문화 포교의 중요성이 주목받고 있는데요. 한편으로 전통을 이어가고 또 한편으로 새롭게 만들어가는 이러한 이중의 과업이 우리의 역사가 아니었나 생각이 되고 앞으로도 이러한 길에 우리 모두 지혜를 모아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불교방송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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