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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 전법후원국장

출연 : 구상진 대한불교진흥원 이사

방송 : 2020년 11월 15일(일요일) 저녁 6시20분(BBS 라디오)

 

김봉래 : 우리 사회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 진행을 맡은 김봉래입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의 후유증으로 시끌벅적한데요, 나라를 이끄는 리더십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돌아보게 됩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발전은 제도 발전에 걸맞은 사람의 인격 변화가 따라줘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역사상 많은 선각자들이 있었죠. 특히 우리 불교계에도 많은 스님과 선각자들이 활동해왔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오늘은 대표적인 재가불자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 가지려 합니다.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현대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지도자였죠. 황산덕 박사, 황산덕 박사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대한불교진흥원의 구상진 이사님 모시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김봉래 : 네. 앞서 소개해드린 대로 대한불교진흥원에 구상진 이사님 불교방송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구상진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구상진 : 네. 안녕하세요.

 

김봉래 : 네. 오늘은 구상진 이사님의 스승이시죠. 취현 황산덕 박사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이렇게 모시게 되었는데요. 먼저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취현 황산덕 박사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먼저 행장을 좀 간단하게 소개해주실까요?

 

구상진 : 네. 뭐 세속 약력으로 말씀드리면 황 박사님은 1917년에 평양 부근에서 출생하셔서 평양고보를 거쳐서 경성제대의 법문학부를 졸업하셨고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행정과를 합격하셨습니다. 해방 후 미군정청 보건위생부 법제관, 고려대학교 법학교수님을 하시다가 1952년에 서울법대 조교수로 임용되셔서 형법과 법철학을 강의하셨고, 서울대 제1호 법학박사 학위도 받으셨습니다. 성균관대 법정대 학장과 총장 그리고 제24대 법무부 장관, 제22대 문교부 장관도 역임하셨고, 학술원 회원, 형사법학회와 법철학회 회장, 대한불교진흥원 이사 등도 역임하셨습니다. 재가불자이시면서 사회의 명사로서 많은 활약이 계셨습니다.

 

김봉래 : 네. 법무 장관 또 문교 장관 역임하시고 또 대한불교진흥원에 제2대 이사을 역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구상진 이사님과는 대학 시절 어떤 학연이 있으신 거죠?

 

구상진 : 네. 법학 상의 사제관계는 제가 재학 중에는 황 박사님께서 서울법대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때 문리대 법학개론 강의를 출강하고 계셔서 제가 그것을 찾아가서 한 학점 그냥 한 과목을 수강한 일이 있고, 그 외에 직접 법학을 배운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65년경부터 89년 별세 때까지 20여 년 간에 룸비니회라고 하는 학생 불교단체에서 계속적으로 오랫동안 지도를 받았고 제가 형사법과 법철학 분야의 교수로서 황 박사님의 교과서와 학술자료를 많이 활용했고 또 제가 황박사님의 후배 법조인이기도 하므로 여러 가지로 관련이 많았습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학교 후배이기도 하시고 또 후배 법조인이기도 하시고 또 불가의 어떤 단체의 후배이기도 하시고. 여러 가지 인연이.

 

구상진 : 불교 단체에서는 제가 뭐 또 정확한 제자지요.

 

김봉래 : 그렇죠. 그런데 최근에 황산덕 박사님의 삶을 조명하는 글을 대한불교진흥원이 발행하는 <불교문화>에 기고를 하셨지 않습니까. 제목이 ‘이 시대의 대보살행자’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먼저 어떤 내용인지 간략하게 설명을 좀 부탁드릴까요.

 

구상진 : 네. 황박사님의 약력과 불교계 인연 및 활동 또 특히 불교 관련 저서와 논문을 소개한 것입니다.

 

김봉래 : 네. 그동안에 그런 자료가 산재되어 있는 것을 이사님께서 모아서 두 회에 나누어서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신 것 같은데요. 그러면 본격적으로 취현 황산덕 박사님에 대해서 조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이 아무래도 불교와의 인연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 말씀을 해주실까요.

 

구상진 : 광복 후에 성북동 길상사 자리 저택에 집에, 그게 왕실 소속 집이었던 모양인데 아주 방대한 양의 불경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 분이 공부를 좋아하시니까 불교 서적을 우연히 하나하나 읽다가 불교 책을 아주 많이 읽은 모양이에요. 그 때까지는 그냥 지식으로서 읽었는데 6.25 중에 아들을 두 명이나 아주 안타깝게 연달아 잃게 되면서 예를 들면 지금 금방 같이 나오다가 아들이 죽는다든지 이렇게 된 모양이에요. 그러면서 윤회라든지 무상이라든지 이런 것을 많이 느끼셔가지고 법륜사에 다니셨는데, 사간동에 있는 그 법륜사요.

 

김봉래 : 삼청동 골목이죠.

 

구상진 : 네. 그런데 그 때 1954년 경, 54년에 이 대통령께서 대처승 관계 유시를 하셔가지고 비구-대처 분쟁이 격화가 되었는데 법륜사가 대처 쪽의 본거지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조계사로 황 박사님이 절을 옮기게 되었고.

 

김봉래 : 재적사찰을 옮긴 셈이죠.

 

구상진 : 그 때 비구쪽 대표가 다섯 분이 계셨는데, 그 총대표가 효봉스님이셨던 모양이에요.

 

김봉래 : 네. 송광사.

 

구상진 : 네. 송광사에 계신적도 있고. 효봉스님이 황박사와 평안도 양덕이라고 하는 동향 출신이신가 봐요.

 

김봉래 : 아 그런 인연이 있으셨군요.

 

구상진 : 그리고 효봉스님도 법조인이시다보니까 그래서 서로 가깝게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런데 효봉스님이 황 박사 부인을 보고, 자기가 속가의 딸을 두고 출가하셨다고 되어있지 않습니까. 황 박사 부인을 자기 딸로 착각을 해가지고.

 

김봉래 : 아. 그럴 정도로 닮았나보죠.

 

구상진 : 효봉스님이 그렇게 느꼈다는 거예요. 그래서 황급히 몸을 피하고 이런 일이 생겼답니다. 그래서 나중에 딸이 아닌 것을 알고는 뭐 그런 인연으로 두 사람을 다 속가 상좌로 받아들여 가지고 황박사 부인도 황 씨인데 황이선 여사인데, 그 분한테는 그 자리에서 바로 대법선이라고 법명도 주시고 그 때부터 이 대법선께서는 정화운동에도 많이 참여를 하셨고요. 그리고 황박사님은 청담스님하고 비구-대처 그 과정을 보면서 젊은 불자들이 더 많이 개발이, 그러니까 더 많이 젊은 분들을 불교로 인도해야 된다는 이런 결론을 내려가지고 청담스님하고 두 분이 힘을 합쳐서, 황박사는 교수니까 대학생이나 학생들에게 영향이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청년불교운동을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룸비니 활동으로서 그것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편인데, 룸비니에 뭐 형식적으로 종정이 계신데 초대 종정이 청담스님이고, 2대가 서옹스님, 3대가 성철스님이셨고. 그 이후는 종정이 없어요. 그 다음에 황박사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총장을 하셨고 그 이후에는 총장이 없죠. 황사님 법명 취현의 푸를 취(翠)자, 검을 현(玄)자는 76년도에 통도사에서 경봉스님으로부터 받으셨다고 합니다. 뭐 그렇게 불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참 여러 가지 인연이 모아져서 한 사람의 지도자, 한 사람의 재가불자가 탄생하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특히 기고문에 보면 황산덕 박사께서 본격적으로 불교 신행을 하게 된 것은 1962년에 투옥되었을 때부터다 이렇게 하셨거든요. 그게 어떻게 된 건가요?

 

구상진 : 그 당시에 그 때는 신문사에 주필할 사람도 별로 자원이 없으니까요. 서울법대 교수님들이 여러 신문사의 주필을 맡으셨어요. 그리고 황박사님께서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맡아 계시면서 당시에 소위 3공화국 헌법이라는 것을 제정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헌법 제정에 관해서 학자들이 황박사님이 법학자시니까 논설을 많이 쓰셨는데, 그 중에서 황박사님이 혁명정부의 개헌 방침에 대해서 좀 조언이라고 할까 비판이라고 할까 이런 글을 여러 차례 썼어요. 그런 것 중에 하나가 마지막에 문제가 되었던 게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사설인데요. 그러니까 국민투표만 한다고 해서 헌법 절차를 다 지키지 않고 개헌을 해가지고는 유효한 개헌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셨어요. 이제 이것에 대해서 실제로 그 당시 국회는 해산되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입법 기능을 다 수행하고 있는데 황박사가 하시는 말씀이 법학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혁명정부로서는 처리하기가 곤란한 주장이었을 수는 있겠어요.

 

김봉래 : 그렇죠. 앞서간 주장이셨죠. 굉장히.

 

구상진 : 그래서 결국은 그 일로 반혁명이라고 해서 마포교도소, 옛날에 서대문형무소라고 하던데 그 당시 이름이 개명이 되어서 마포교도소로 되어 있었는데 거기 구금이 되어서 몇 달 간 구속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구속 기간 동안에 뭐 새벽에 4시에 일어나서 천수경, 금강경 독송을 하고 재판 받지 않는 날은 하루 종일 참선을 하고 이렇게 지내신 모양이에요. 본인도 그렇게 지내고 특히 황이선 여사가 우리한테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그 때까지는 황이선 여사도 금강경 읽으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렇게 열심히 안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에 일곱 번씩 읽으라고 해가지고 뭐 저녁에 설거지 마치고 읽으면 처음 읽으면 새벽 몇 시가 되고 이랬대요. 그런데 어느 날 금강경 7편을 읽을 때 갑자기 그냥 완전히 천지가 다 없어지고 앞이 그냥 완전히 트이는 그런 특이한 경험을 한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 다음날 황박사님이 석방이 되었답니다. 그래가지고 그것 때문에 그런 것인지 그 이후에 돌아가실 때까지 뭐 외국 여행을 가든 하루도 아침 예불을 거르지 않으시고 천수경과 반야심경 하시고 금강경을 한 번 이상 독송하시고. 또 계율 중에서 특히 언행일치를 중시하셔가지고 그러니까 이 분이 학술적인 이런 학문적인 설명은 많이 하시는데 평소에는 별 말씀이 없으세요. 언행이 아주 일치하게 노력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어쨌든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 어려운 상황을 부처님 법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그런 인연을 만났다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황산덕 박사님의 불교계 활동도 좀 조명을 해봐야 될 것 같은데요. 그 중에서도 저술 활동, 글도 굉장히 많이 쓰셨던 것 같아요. 저도 어린 시절에 나가르주나 존자의 <중론송> 번역한 것을 읽고는 했는데 그런 주요 저서를 좀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구상진 : 원체 많아서.

 

김봉래 : 네. 요약을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구상진 : 불교에 관한 단행본으로서는 <불교교과서>도 쓰셨고요. 말씀하신 지금 나가르주나의 <중론송>도 번역하셨고. 그 다음에 <삼현학>이라고요, 삼현은 유불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불도 전부를 통섭하는 책도 쓰셨고, 그 다음에 도는 도교 이야기죠. 그리고 <여래장>과 <창조주의 복귀>라는 책이 이 분께서 쓰신 상당히 독창적인 책이고요. 그 외에 <원효열반종요>라는 책도 쓰셨는데요. 복귀 책에서는 그 첫 테마가 복이라는 것은 우리 광복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이제 돌아온다는 건데, 그러니까 우리 예컨대 단군에서 개국이 되었다고 한다면 일제에서 국권을 상실했을 때 한국의 한 역사 주기가 끝났다고 황박사님은 생각하세요. 그래서 이제 광복에 의해서 돌아왔는데 그게 복이 다시 돌아왔다는 겁니다. 이 돌아온 이후의 역사가 처음에 이 책을 낼 때 <무엇이 돌아오느냐>로 내셨거든요. 그러니까 그 광복 이후의 우리 민족이나 국가의 운명이 무엇일 것인가를 주로 말하는 경향이었어요. 그런데 그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가진 우리 심성의 근본인 여래장을 발휘를 해서 진정한 역사의 창조자로서 대처를 해나감으로써 역사를 개척해나가야 한다는 그런 종류의 결론에 도달하는 건데. 그렇게 간단하게 된 것이 아니고 많은 주역의 괘상도 설명이 있고 미래에 대한 이 분이 이것을 혼자 쓴 게 아니고 그 당시 김범부라고 역학 전문가가 있었어요. 그 분하고 이항녕 교수를 포함한 석학들이 근 5년 이상 연구를 해서 쓴 책입니다. 뭐 그런 책이고요. 그 외에도 글로는 예컨대 “왜 불교를 믿게 되었나”, “나의 재가 수행”, “사찰재산의 운영”, “불교와 정치 법률사상”, “구원의 불교적 의미와 본질”, “불교와 법철학”, “진여와 창조” 등등.

 

김봉래 : 엄청난 저술도 많았고요.

 

구상진 : 굉장히 많았죠.

 

김봉래 :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또 형법학자로도 학술활동도 꽤 많이 하셨잖아요.

 

구상진 : 네. 그 형법은 총론과 각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총론은 이론체계인데 그 당시까지는 60년대까지는 일본 법학의 그 잔여, 남아있던 체계를 가지고 형법학이 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불합리한 부분도 있고 모자란 것도 있었는데, 2차 대전 이후 독일에서 새로 발전한 형법 체계를 황박사님이 직수입을 해가지고 그것으로써 우리나라의 형법총론 이론을 황박사가 완전히 변형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한국의 형법학은 그 토대 위에서 지금 되고 있고요. 그 다음에 또 법철학자로서도 오늘날의 현대의 한국 법철학의 토대를 구축하셨고요.

 

김봉래 : 뭐 불교계 활동, 대사회적인 활동 너무 많기 때문에 시간 관계상 자세하게 소개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우선 불교계 활동에서는 아까 룸비니회 총장하신 부분, 그 다음에 대한불교진흥원 제2대 이사으로 오늘날의 현재 이 다보빌딩을 매입하는 데 역할을 하셨다는 내용이 있더라고요.

 

구상진 : 아까 조계종단 출범에서도 효봉스님을 도와서 많은 활동을 하셨고 룸비니회에서도 뭐 우선 저도 룸비니회 출신입니다만 룸비니회에서도 사람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서울대학교 현 오세정 총장도 룸비니회 출신이죠.

 

김봉래 : 아. 그렇군요.

구상진 : 그리고 불교진흥원 이사장으로 계시면서 그 때가 10.26 이후에, 10.26 이전에는 구태회 씨가 이사장을 하셨는데 10.26 이후에 황박사님이 맡으셔서 꽤 여러모로 까다로운 점이 있었는데, 이 분이 진흥원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고 통일법요집을 만들어서 불교성전 5만부를 전국에 무상 배포하기도 했고요. 그 다음에 지금 우리 쓰고 있는 이 다보빌딩하고 불교방송국 건립에 관한 계획을 다 수립하셔서 시행은 후임 이사장 장상문 이사장님께서 시행하셨는데 건립 계획이나 기본 자금도 만들어야 되니까, 그것을 다 황박사님이 다 만드셨다고 합니다.

 

김봉래 : 그 외에도 대한불교청년회라든가 대학생불교연합회라든가 각종 단체 지원하는 그런 활동이 굉장히 많으셨다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이한 게 부처님오신날 제정과 관련해서 황상덕 박사님의 역할이 컸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소개를 좀 해주실까요?

 

구상진 : 네. 작고하셨는데 용태영 변호사라는 분이 계셨어요. 이 분이 73년도에 불탄일을 공휴일을 지정해달라고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1심을 다 지고 대법원에 상고가 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그런 상태에서 75년 1월 달에 국무회의를 마친 뒤에 그 때 황박사님은 법무부 장관이셨던 모양인데, 박정희 대통령께서 회의 안건을 마치고 나서 불탄일을 공휴일로 정하는 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을 해서 올리면 결재하겠다고 말씀하신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 논의가 됐는데, 논의를 하니까 그 중에 한 국무위원이 인도 사람이 교주인 종교에 대해서 공휴일을 만들 이유가 없다 이렇게 된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황박사님이 유태인이 교주인 종교는 공휴일이 되도 되느냐 뭐 이렇게 따지신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또 다른 국무위원이 크리스마스는 일제 때부터 공휴일이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황박사님이 그 당시에 12월 25일은 크리스마스로서 공휴일이었던 것이 아니고 대정이라고 일본 천황이 있었어요 쇼와의 선친이죠, 그 대정 천황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공휴일이었는데 그 대정 천황 제사가 없어진 이후로는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고 설명을 했답니다. 그러니까 경제 건설 이유로 반대를 해서 경제가 그렇게 걱정된다면 크리스마스도 없애자 이렇게 했답니다.

 

김봉래 : 네. 아주 지혜롭게 답변을 하셨던 것 같아요.

 

구상진 : 그러니까 아마 김종필 씨가 총리였던 모양인데. 그 분이 5월 5일을 공휴일로 하자는 의견도 많이 있으니 어린이날과 석탄일을 함께 공휴일로 하면 타종교도 반발이 줄지 않겠느냐 이런 중재를 한 모양이에요. 그래가지고 공휴일이 되었다고 합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참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요.

 

구상진 : 그 해 첫 불탄일에 1,381명을 가석방하셨다고 하고.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용태영 변호사에 대한 객담을 하나 하겠는데, 이 분이 성서에 유일신을 하느님 또는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에도 맞지 않고 한국의 전통신앙에도 맞지 않으니 성서에서 하느님이나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써서는 안 된다 이런 소송도 했어요. 뭐 이기지는 못했지만.

 

김봉래 : 어쨌든 지금 용태영 변호사님 이야기도 나왔습니다만 요즘에 이렇게 사회 원로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 걱정들을 많이 하는데, 그럴수록 황산덕 박사님 뭐 또 용태영 변호사님 이런 분들에 대한 그리움이 커질 것 같아요.

 

구상진 : 네. 뭐 저는 황박사가 세속의 온갖 번뇌를 마다하지 않으시면서 선승과 같은 기개와 지혜로 치열한 삶을 사셨던 창조적 지성인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석학으로 꼽히는 이항녕 박사 황박사의 유고집에 유고집 이름이 <법과 사회와 국가>인데요 그 머리말에 “그는 지금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인류에게 인간의 본성의 복귀를 외쳤으며, 그의 복귀 사상은 동양의 유교 사상과 불교 사상을 결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기독교 사상과의 결합도 시도하고 있어 그가 좀 더 장수했으면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위대한 사상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뜻밖의 별세로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안쓰럽다.” 뭐 이런 내용을 쓰고 있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앞으로 불교가 시대를 선도해야 한다, 했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이 많은데요 우리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짧게 말씀을 주신다면요.

 

구상진 : 네. 요즘 나라 안팎이 뭐 우리 다 아시다시피 대단히 어지럽고 세상이 변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 분들께서는 너무 수준이 높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실행하지 못하는 점이 있는 것이지 부처님 가르침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봉래 : 네. 그래서 저희가 그런 부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깨달아서 개인의 문제뿐 아니라 사회문제까지도 우리가 같이 해결을 해 나가야 되잖아요.

 

구상진 : 그렇죠.

 

김봉래 : 그런 점에서 종단에 혹시 건의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실까요.

 

구상진 : 네. 뭐 대단히 조심스럽고 어려운 이야기인데 어쨌든 특히 조계종 출가승들의 역할이 아무래도 중대하지 않습니까.

 

김봉래 : 네. 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이니까요. 조계종이.

 

구상진 : 아무래도 조계종 스님들께서 사부대중과 화합을 하셔서 불교도를 통합적으로 힘을 결집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요, 지금 그런 것이 잘 안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김봉래 : 네.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구상진 :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일단 스님들께서도 내가 중생의 귀의처니까 중생들이 나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한다, 이런 식의 접근보다는 같이 동사섭을 하셔서 사부대중과 화합을 하는 것을 좀 노력을 하셔야 될 것 같고, 특히 교법이 아닌 종단의 일반 사무나 세속 사회와 관해서는 전문적인 세속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는데요. 예를 들면 뭐 요즘 동성애 지지 서명도 하고 교단의 재정 문제는 속가에서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입장을 가지고 계시는데, 이런 부분은 제가 생각했을 때는 다시 한 번 검토를 해보는 것이 좋지 않으실까.

 

김봉래 : 그러니까 승가와 재가의 어떤 역할 분담 이런 부분들이 조금 더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말씀을 주시는 것 같은데요. 뭐 교계 단체나 특히 저희 불교방송 같은 불교 매체에도 좀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같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구상진 : 네. 뭐 불자들은 결국 혼자서도 수행을 하고 신행을 해야 되겠지만 또 모여서 도반이 되어야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절차탁마도 하고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불자들의 어떤 결집도 그것이 필요하고 또 교리나 수행에 한정할 것이 아니고 세상사에 관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의 측면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이런 것을 조직적으로 협의도 하고 방안을 강구해나가야 될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김봉래 : 네 올해가 저희 BBS 불교방송이 개국한지 30주년이 되는 해인데요 특별히 당부하실 말씀 주시면 좋겠습니다.

 

구상진: 네. 요즘 뭐 언론 매체들이 다 몹시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건이 어려운데 여러 가지를 주문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불교방송은 단순한 매체가 아니고 이것 자체가 불법 홍포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또 시청자들의 수행을 인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그냥 일반 직장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부처님이, 성불하신 분께서 맨발로 전 인도를 그렇게 다니시면서 일일이 중생을 도우려고 애를 쓰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출가 정신으로 감동이 되는 프로그램을 만드셔서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중생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이렇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봉래 :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 이제 마무리 질문 드려야 되겠는데요. 지금 대한불교진흥원의 이사로서 활동하시고 또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 이끌면서 법치주의 확립을 위해서도 많이 애를 쓰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향후 비전과 관련해서 말씀해주시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구상진 : 네. 요즘 뭐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지만 제가 보기로는 우리나라는 이승만, 박정희 등 초인적 지도자들 덕분에 자유국가로 건국도 되고 또 오늘날의 이런 경제 수준도 달성을 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그 지도자들 덕을 보다보니까 국민들의 정신 자세가 거기에 못 따라간 측면이 있고. 요즘은 뭐 여러 가지 이유로 국가의 법질서가 거의 그 지금 와해되는 지경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바로잡으려면 이것을 그 누군가 나서서 해야 되는데 옛날처럼 무슨 특정인들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글쎄 불교에서 우리가 사람이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불성이 있기 때문에 존엄한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관과 그 다음에 보살정신,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근본이고 민주주의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과거에도 우리가 나라가 여러 번 어려웠을 때마다 불교가 나서서 국난 극복의 원동력이 되었던 일이 많은데 지금 다시 한번 불교도들이 마음을 모아서 나라의 융성을 다시 창조해내야 될 것으로, 그런 때가 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김봉래 : 네. 오늘 장시간 말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대한불교진흥원 구상진 이사님과 함께했습니다.

 

김봉래 : 네. 여러분 대한불교진흥원 구상진 이사님과 함께한 오늘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모두가 불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 개유불성의 인간관에 기초해야 한다는 그 말씀에 주목을 해봅니다. 그리고 서로 위하는 이런 보살도에 기초해야만 민주주의가 발전한다 그런 말씀 되새깁니다. 개인주의냐 공동체주의냐 이런 양극단이 아니고요, 이 두 가지가 잘 조화될 수 있는 그런 철학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꽃피우는데 다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다 그런 말씀 드리면서 오늘 순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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