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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

오늘은 독립군과 일본군 간 '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당시 독립군은 만주 청산리 부근에서 엿새간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항일 독립운동사에 큰 전과를 올렸는데요.

청산리 전투 100주년의 의미와 과제를, 김연교 기자가 짚어봤습니다. 

 

< 리포터 >

100년 전 오늘, 만주 청산리 백운평 고지에 매복해있던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가 일본군을 기습했습니다.

독립군은 지형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일본군 300여 명을 사살하며 승전보를 울렸습니다. 

같은 날, 이도구 어랑촌에서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일본군 수백 명을 섬멸했습니다. 

독립군은 이후 6일간 어랑촌과 맹개골, 천보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고, 26일 고동하 전투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두며 '청산리 대첩'의 막을 내렸습니다.

[전지명 / 백야김좌진기념사업회 이사장]
"일제 식민통치로 억압받던 우리 민족에게 이 전쟁의 승리는 패배의식을 불식시키고 일제를 물리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 민족적 자긍심을 갖게 했다는 점입니다."

1920년 6월 벌어진 '봉오동 전투'부터, 넉달 뒤 '청산리 전투'까지.

독립군이 연이어 승기를 잡은 배경엔 우당 이회영 선생이 가족과 함께 전 재산을 처분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가 있습니다.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졸업생 3500명은 만주·연해주 일대 독립군에 합류했고, 청산리 전투 승리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이종걸 /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 우당 이회영 손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1920년에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 등에 사관과 사령관, 병사로 포진돼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대승을 거두는데 큰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죠"

하지만 후대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극소수입니다.

당시 일본군에 맞섰던 무명의 병사들을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김원웅 / 광복회장]
"몇 천명이나 전사하고 다른 전투에서도 희생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몇 분들 이외에는 역사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름도 안 남기고, 후손도 없는 점이 참 안타깝습니다."

청산리 전투 100주년,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독립군 한 명 한 명을 기억하는 일은 여전히 우리 후대의 몫으로 남아있습니다. 

BBS 뉴스 김연교입니다. 

영상 취재 / 편집 : 강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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