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멘트]

웃음이 부족했던 시절,
웃음에 목말라하는 국민들에게 큰 기쁨을 줬던 고 김형곤씨.

오늘 문화산책 이 시간에는
고인이 남긴 크고도 아름다운 발자취를 따라가 봤습니다.

이용환 기자입니다.

[리포트]

1. 세상에 웃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인간이 동물에 비해 우월한 이유도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2. 자신의 기막힌 죽음을 알기라도 하듯 지난 11일 세상을 떠난
개그맨 김형곤이 숨지기 하루 전날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글입니다

3. 그렇게 지천명을 맞아 저 세상으로 간 김형곤의 일평생 화두는 웃음이었습니다.

<인서트>

4. 1959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김형곤은
80년 TBC 개그 콘테스트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방송계에 데뷔했습니다.

5. 이후 8, 90년대를 자신의 독무대로 만든 김형곤은
혀 짧은 듯한 발음의 핸디캡을 재치 있는 언변과 정곡을 찌르는 풍자로 이겨냈습니다.

6. 또 120킬로그램을 넘나드는 비대한 몸집을 공포의 삼겹살로 희화시켜
스스로를 웃음의 소재로 활용했습니다.

<인서트>

7. 김형곤을 가장 김형곤 답게 만든 것은 시사 풍자 코미디의 영역에서였습니다.

8.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과 탱자 가라사대 등의 코너에서 김형곤은
수많은 유행어와 날카로운 풍자로 많은 인기를 얻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인서트>

9. 그러나 서늘한 시대에 시사풍자를 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인서트>

10. 그렇기 때문에 김형곤은 살아생전 우리 시사풍자 코미디의 발전을 위해서는
정치인들이 먼저 마음을 열어야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였습니다.

<인서트>

11. 개그맨으로 성공한 김형곤은 남다른 사업 수단으로 돈도 모았지만
별안간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쓴맛을 보고 말았습니다.

12. 지난 2천년 무소속으로 도전한 국회의원에 낙마하면서
그는 그 동안 사업으로 모았던 재산을 잃고 이혼의 아픔도 겪어야만 했습니다.

13. 아내가 떠나고 마흔이 다 돼 본 외아들마저 홀로 유학을 보낸 뒤 김형곤은
낙담하고 좌절했습니다.

14. 세상은 멸시와 비아냥을 퍼 부으며 이제 김형곤은 끝났다고 조롱했습니다.

15. 김형곤이 재기의 상징으로 또 그 의지의 표현으로 살빼기를 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인서트>

16. 한때 120㎏까지 나갔던 몸무게가 30㎏까지 빠지자 김형곤은
방송 대신 연극 무대를 택해 각종 공연을 열며 다시 활발한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인서트>

17. 그렇게 활기찬 재기의 몸짓으로 제2의 도약을 준비하던 어느 봄날

18. 빡빡한 자선활동과 저술활동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우리나라 코미디언으론 처음으로 미국 카네기홀 공연을 불과 20일 앞둔,
아니 그 무엇보다 영국에 홀로 공부하는 늦둥이 외아들을
혼자 외로이 남겨두고 김형곤은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19. 지난 13일 오전
김형곤씨의 영결식이 대한민국 희극인장으로 치러졌습니다.

20. 풍자 개그의 1인자 김형곤씨가 영원히 세상과 작별하는 그 자리에는
수많은 선후배, 동료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인서트>

21. 남김없이 모두 주고 가겠다는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시신은
연구용으로 기증됐습니다.

22. 온 국민이 매일 웃다가 잠들 수 있으면 좋겠다던 코미디언 김형곤

23. 웃음과 시신을 남기고 간 그지만 그의 환한 웃는 얼굴만큼은
3월의 봄 하늘에 떠있는 듯 합니다.

BBS뉴스 이용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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