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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아야! 별은 그저 별일뿐이었다. 별을 위해 이름을 짓고 의미를 부여하고 노래까지 부른 것은 인간이었다. 별을 바라보는 마음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름다움은 남겨질 때 추억으로 붙들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은 너무도 일찍 깨달았다.연아야! 그래도 ‘너’란 아름다움을 추억으로 붙들기 위해 남기는 작업 따위를 벌써부터 하고 싶진 않다. 아니 가능하다면 영원히 하고 싶지 않다. 연아 너는, 시니어무대에 오른 이래 높이만 달랐을 뿐, 시상대에 오르지 않은 적이 없다. 연아 너
양창욱의 ‘야단법석(野壇法席)’
양창욱
2015.12.18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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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상트는 물의 도시다. 네바 강 하구 삼각지가 잉태한 수많은 자연 섬과 운하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수백 년 전 도시를 짓기 위한 표트르 대제의 가혹한 폭정으로 습지로 내던져진 노예들의 영혼은 이곳을 근현대까지 도도한 혁명의 도시로 만들었다.지난해 이맘때, 이 곳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잘나가는 국가들의 수장 20명이 모여 세상사를 논했다. 음흉한 속물 정치꾼들의 이런 모임은 언제나 요란스럽지만 실속이 없다. 알맹이 없이 서로 듣기 좋은 얘기들만 되풀이 하다 사진 찍고 서둘러 헤어진다. 아빠는 이 모임을
양창욱의 ‘야단법석(野壇法席)’
양창욱
2015.12.18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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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수 년 정치부 기자생활 동안 해를 거듭할수록 분명하게 느끼는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것이다. 단군 이래 최악이라는 실업난에 부모세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스펙(Specification)을 갖추고도 ‘청년백수’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세상은 100세 시대를 외치고 있지만 40대 후반만 되면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할지 입에 풀칠할 걱정을 하는 상황에서, 공무원만큼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철밥통’이 또 어디 있느냐고 다그칠지 모르겠지만 ‘철밥통’을 지키기 위한 공무원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안쓰럽
양창욱의 ‘야단법석(野壇法席)’
양창욱
2015.12.18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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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우려는 기어이 현실이 됐다. 예고됐던 유럽의 텃세와 러시아의 난폭한 편파 판정은 여왕의 마지막길을 끝내 막아섰다. 무려 20년 동안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던 유럽은 아주 작정을 하고 ‘점수 퍼주기’ 심판진을 구성했고, 연아가 등장할 때 부부젤라까지 불어대던 버릇없는 러시아 관중들은 전날 핀란드에게 져 4강 진출이 좌절됐던 아이스하키에서의 패배를 연아의 금메달을 도둑질함로써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기자가 백번을 양보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금메달을 딴 아델리나 소트니코바가 획득한 점수이다.
양창욱의 ‘야단법석(野壇法席)’
양창욱
2015.12.18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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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정가에 돌아다니는 개(犬)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나친 과장의 농(弄)이겠지만 그만큼 정치판에 돈이 튀는 세월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정분리는커녕 대통령이 제왕적 총재로 군림하던 시절이었으니만큼 정권의 흥망을 가르는 대형선거라도 벌어질 때면 내려가는 돈도, 뿌리는 돈도 많았고 당의 살림을 맡고 있는 당 사무총장의 문 앞은 이른바 총알(선거자금)을 지원받으려는 인사들로 늘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뤘다.물론 돈은, 정권을 잡은 여당 의원들이 많았다. 뭐든지 주먹구구로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세월이었기에 형
양창욱의 ‘야단법석(野壇法席)’
양창욱
2015.12.18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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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아득한 세월 같아도 채 30년이 안된 시절의 얘기다. 하루 종일 서울 도심에 군화발소리가 진동하고 땀 냄새 밴 청바지를 입은 사내들이 몽둥이를 들고 활개 치던 그 시절, 최동원·선동렬의 강속구와 국산토속에로물외에는 마음 둘 곳이 없었다. 1987년, 인간백정 이근안이 서울대생 박종철을 고문으로 죽인 사실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세상밖에 알려지자 직장에만 웅크리고 있던 100만 명의 넥타이 부대들이 광화문, 서울시청 한 복판으로 뛰쳐나와 직선제 개헌을 외쳤다. 같은 해 6월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던 노태우는 6·
양창욱의 ‘야단법석(野壇法席)’
양창욱
2015.12.18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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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시설과 규모를 갖춘 첫 공연장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시민회관이었다. 그리고 4천석 규모의 이화여대 강당이 있었다. 특히 1972년 시민회관이 화재로 영영 사라진 뒤에는 이대 강당이 그 역할을 주도적으로 대신했다. 1969년 《The Young Ones》《Summer Holiday》등 숱한 히트곡을 내며 전 세계 소녀들의 로망이자 팝의 피터팬으로 불리던 영국 가수, 클리프 리처드가 이대 강당에서 내한 공연을 했다. 열광한 인근 고교의 소녀 팬들은 자신의 마스코트와 액세서리, 손수건 등을 실성한 사람들처럼 날려 보
양창욱의 ‘야단법석(野壇法席)’
양창욱
2015.12.18 2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