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에서 반세기를 넘긴 내게 출근길은 단순하다. 3km 남짓의 거리를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루트가 달라질 뿐이다. 걸을 때나 자전거를 탈 때나 마을버스 혹은 승용차를 활용할 때 달라지지만 그것도 큰 차이는 없다. 목적지가 같기 때문이다. 데스크가 되면서 취재현장이 아닌 회사로 출근하다보니 일상화된 일이다. 하지만 도시에는 늘 새로운 도로가 생기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니 언젠가부터 내 주된 승용차 출근길도 바뀌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마주하는 오랜 건물 표지석의 시(詩)가 나의 아침이 돼버렸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
바람은 불었지만 그리 춥지 않았다. 땅이 녹으면서 흙은 질척거렸다. 큰맘 먹고 산 가죽구두에 진흙이 묻을까 신경이 쓰였다. 주변에서 눈을 번득이던 낯선 가죽점퍼 역시 마음을 편치않게했다. 곁에 있던 친구는 소매를 잡아끌었다. 떠나자는 메시지였지만 스피커 소리에 묻혀버렸다. 후보 연설과 함께 말이다. 청중들의 조심스런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당선돼야할 후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1985년 2월, 마포의 한 초등학교 교정의 표정. 내가 경험한 첫 선거였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지만 투표권은 없었다.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언젠가부터 같은 영화를 여러번 보는 재미가 생겼다. 물론 무조건은 아니고 보고싶은 생각이 드는 영화에 한해서다. 특히 울림을 주는 시네마는 케이블로 옮겨가 필름이 닳고 닳아도 놓치지않으려 애쓴다. 그러다보니 명대사는 어김없이 머리에 남아 귓전을 맴돌기 일쑤다. 두 번 볼 때 세 번 볼 때 느낌과 감동이 다르다. 숨은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고 사각지대에 있는 배우들의 표정이 읽힌다. 나도 모르게 매니아의 첫걸음을 내디딘게 아닌가 싶다. 국내에서 1천만 영화는 영화의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라고 한다. 유권자의 득표수로 환산하면 대통령에 당
1999년 3월의 첫주말, 장전항에는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금강호 객실에서 뿌연 창문을 통해 내다본 북녘땅은 날씨때문인지 의씨년스러웠다. 배에서 내려 검문소를 통과해 현대 버스에 오르기까지 다들 말을 아꼈다. 관광의 기분을 내기 시작한 것은 목란관을 지나 외금강에 오르며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느끼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천선대에서 바라본 비경이 구룡폭포에 다달아서는 함박눈과 함께 또다른 절경을 보여줬다. 지금도 꽤나 많은 아날로그 사진이 남아있는데, 무엇보다 내 기억에 오롯이 남아있다. 금강산을 만난 것은 정비석의 ‘산정무한(山
미국의 민주주의를 거론할 때면 늘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제37대 대통령 닉슨(Richard Nixon)이다. 1960년 케네디와의 첫 TV 토론으로 미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고 정계은퇴와 복귀를 통해 대권을 장악하는 ‘닉슨 플랜’이라는 대선전략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사실상 30여년만의 공화당 정권교체로 불리는 대선에서 이겼다. 하지만 대중적이지못했고 언론에게는 꽤 인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펜타곤 게이트(1971)’에 이어 ‘워터게이트(1972)’로 재임중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니까 말이다. 특히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지금도 광화문을 지날때면 나도 모르게 읇조리게되는 노래가 있다. 짧지만 깊이가 있고 평범하면서도 경건한 노랫말. 거기에 비장하면서도 슬프지않고 조용하면서도 경쾌함마저 느껴지는 곡조. 부를수록 마음에 사무치는 의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않는다’. 세월호 유가족만의 노래는 아니었다. 누구든 따라부를 수 있었다. 함께 크게 부를 수도, 혼자 흥얼거릴 수도 있었다. 오랫동안 전해져내려온 구전가요와도 같았다. 그렇게 큰 목소리로 모아질 지 몰랐다. 불과
(한강 당산철교옆 잠두봉) 유난히도 높은 하늘이다. 눈이 시릴만큼 깊고 푸르다. 조금은 서늘한 강바람이 금새 시원해진다. 때늦은 수상 스키에 밤섬이 그 곁을 내준다. 강변에서 걷고 뛰는 이웃들 모습에서 여유와 힘이 느껴진다. 차창에 스치는 한강도 좋지만 그 굴곡을 천천히 훑어가며 감상하는 파노라마는 절경 그 자체였다. 나는 이렇게 지난 주말 자전거로 한강변을 따라가며 아름다운 서울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눈부신 경관 한켠에는 역사의 아픔을 오롯이 간직한 유적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그 현장을 찬찬히
격동의 시절을 보내고 맞은 지난 6월의 어느날. 유달리 퇴근을 서둘렀건만 지방에 있던 나로서는 어쩌면 늦는건 당연했다. 약속시간을 조금 넘어섰지만 마음이 급했다. 숨가쁜 역사의 한복판에서 의연히 판결을 내렸던 분을 뵈러 가는데도 퇴근길은 예외없이 혼잡했다. 어렵사리 도착한 서울의 최고 번화가 압구정동에 소탈하고도 정겨운 칼국수집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넓지않은 홀과 방. 빈 테이블이 없을 만큼 손님들로 빼곡했다. 그 방 한쪽 구석에 작은 상을 앞에 둔 지인 셋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뛰어들어가며 손을 맞잡고 인사를 드렸
지난해 9월 1일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는 중국과의 월드컵 예선전이 있었다. 반세기 가까이 스포츠 현장을 누벼온 7순의 대기자는 그 취재현장에서 친분이 있던 20년 후배 기자에게 말을 건넸다. 체육계에 떠도는 의혹에 대해 세밀한 취재를 권한 것이다. 이른바 ‘K 스포츠재단’에 대한 삼성의 지원과 관련된 문제제기였다.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대한 궁금증도 털어놨다. 그로부터 20일후 큼지막한 활자체의 1면 톱기사가 정국을 뒤흔들었다. 국회 국정조사를 앞두고 터진 기사가 전국에 촛불을 키우는 계기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못했다.
지난해 가장 큰 감동을 준 영화를 들라면 나는 ‘동주’를 꼽는데 주저하지않는다. 3.1절 오후에 빼곡이 들어찬 홍대 앞 영화관에서 꽤나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남녀노소 모두가 눈물에 젖었던 것은 암울했던 시절, 순수한 젊은 시인의 짧은 삶이 가슴에 저며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달, 총선이 있었다.춘천을 오가던 나는 그곳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싶었다. 보수 색채가 유독 강하던 춘천. 때마침 만난 향토 한학자가 큰 힘이 됐다. 의병 대통령이라 불렸던 의암 류인석에서부터 습재 이소응, 홍재학, 김영하 선생 그리고 춘천고 학생들의 상록